‘난도질’ 뉴스위크 5.18 기사, 40년 만에 원본 찾았다
서울기록원, 80년대 검열됐던 기사 입수
“군부, 평화적 해결방안 제 발로 차버려” 내용 담겨
[오마이뉴스] 글: 강연주, 소중한 | 20.05.10 12:00 | 최종 업데이트 : 20.05.10 14:53
6쪽부터 10쪽까지가 텅 비어있었다. 본문이 사라진 자리엔 찢긴 흔적만 남았다. 심지어 목차 부분엔 가위로 도려낸 흔적도 있었다.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확인한 1980년 6월 2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모습이다. 상황은 국립중앙도서관도 같았다. 찢겨나간 <뉴스위크>의 지면에는 1980년 5월의 광주가 기록돼 있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왜 이러한 모습의 <뉴스위크>가 보관돼 있는 걸까.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외신을 모두 검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오는 18일, 꼬박 40년 만에 잃어버린 기사 원본이 공개된다. 서울기록원에서 5.18민주화운동(아래 5.18) 40주년을 맞아 주최한 <넘어넘어 : 진실을 말하는 용기> 기획전에서다. 고아름 서울기록원 학예연구사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면서 “해당 잡지를 갖고 있었던 해외 구매자와 수차례 접촉해 원본을 입수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7일 서울기록원을 통해 1980년 6월 2일자 <뉴스위크>의 사본 중 5.18이 보도된 부분을 확보했다. 해당 기사에는 광주의 참상·전두환 신군부가 자행한 폭력·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 등이 담겨 있다. <뉴스위크>는 기사 첫머리부터 “(5.18은) 6.25 전쟁 이후 한국에서 발생한 폭력사태 중 최악의 사건이었다”라며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비판을 가감 없이 적었다.
<뉴스위크>는 5.18 당시 시민군과 정부군의 대치 현장을 그리면서 “광주의 시위대는 자생적이었지만, 정부는 이를 ‘자극적인 선동가’ 또는 ‘북한에서 파견된 선동가’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당시 북한이 38선을 넘으려는 유혹에 빠질 위험은 당장 없어보였다”며 여론을 왜곡하려 한 전두환 신군부를 지적했다.
신군부를 두고는 “거의 모든 민주적인 통치의 흔적을 없애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라며 “퇴역 장성들이 장악한 새 내각에는 전두환의 정치적 견해가 반영됐다”고 전했다. 이어 “전두환의 권위주의적 행보는 한국의 국가 이미지와 경제를 위협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장군들(신군부) 밑에서 국가의 민주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신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기사를 갈무리했다.
“군부세력은 평화적으로 해결방안을 도출하기 위한 기회를 제 발로 차버렸다. (중략) 권력을 움켜쥐고자 하는 전두환씨는 완전한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위기가 장기화 되자, 전두환은 이틀 연속 같은 장소에서 잠을 자지 않고 자주 거처를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뉴스위크>의 기사는 국내에 알려지지 못했다. 신군부가 국내에 유통되는 모든 외신 기사의 한국 관련 지면을 훼손하거나 삭제했기 때문이다.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뉴스위크> 원문이 손상돼있던 이유다.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으로 한국(경기도 안양)에 있었던 빌 에이머스(Bill Amos)는 신군부가 자행한 언론 검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9일 <오마이뉴스>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당시 우리 자원봉사자들은 <타임>이나 <뉴스위크> 잡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우편 받아 볼 수 있었다”면서 “하지만 그 잡지들의 일부 문장이나 지면들은 지워져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어 “미국인인 우리는 그런 노골적인 언론 검열에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내가 놓치고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며 “동시에 이런 언론 검열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안양) 밖에서(광주)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첫 징후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
간혹 신군부의 눈을 피해 검열을 거치지 않은 원문 잡지를 확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하거나 알릴 수 없었다. 빌 에이머스는 “서울 평화봉사단 사무실에서 누군가 검열 받지 않은 잡지와 신문을 확보했고, 관련 기사들을 복사해 벽에 붙였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복사해서 한국인에게 배포하는 것을 (한미 정부로부터) 엄격히 금지당했다”고 전했다.
국회도서관 관계자는 “찢겨진 것 자체도 역사”라고 말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한 언론 검열의 증거라는 의미다. 당시 <뉴스위크>뿐만 아니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도 1979~1980년 한국 관련 기사가 삭제된 채 유통됐다. 현재 국회도서관은 당시 삭제됐던 <타임>의 기사 일부를 확보해 놓은 상태다.
서울기록원이 수집해 오는 18일 최초 공개하는 <뉴스위크>는 당시 주로 유럽에 유통됐던 국제판이다. 서울기록원은 해외 개인 소장자를 통해 1980년 6월 2일자 <뉴스위크> 국제판을 온전히 보관하고 있던 이로부터 해당 잡지를 구매했다.
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에 남아 있는 잡지는 미국 내에서 유통되던 것(미국판)이다. 서울기록원 측은 “당시 한국에는 <뉴스위크> 미국판이 들어왔다”라고 설명했다.
서울기록원이 입수한 국제판과 한국에 남아 있는 미국판은 표지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국제판 표지에는 1980년 5월 18일에 있었던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이, 미국판 표지에는 5.18이 담겨 있다. 국제판은 세인트헬레나산 화산폭발과 마이애미 폭동(5월 17~20일)을 각각 순서대로 보도했고 5.18 기사는 세 번째로 다뤘다. 미국판은 5.18을 첫 기사로 놓고 주요하게 다뤘다.
서울기록원은 오는 전시회에서 <뉴스위크>의 기사뿐만 아니라 5.18을 생생히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판본 10종, 5.18관련 자료집, 5.18 관련 해외 기사 등 다양한 기록물들을 공개할 예정이다.
■ 뉴스위크 기사 번역 : 송재걸 (카디프대학 석사학위 논문 <The Gwangju Democratisation Movement and the Role of International News Flows> 저자)
출처 [단독] ‘난도질’ 뉴스위크 5.18 기사, 40년 만에 원본 찾았다
서울기록원, 80년대 검열됐던 기사 입수
“군부, 평화적 해결방안 제 발로 차버려” 내용 담겨
[오마이뉴스] 글: 강연주, 소중한 | 20.05.10 12:00 | 최종 업데이트 : 20.05.10 14:53
▲ 국회도서관에서 보관된 1980년 6월 2일자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 내용 중 5.18민주화운동 부분이 잘려 나가있다. ⓒ 강연주
6쪽부터 10쪽까지가 텅 비어있었다. 본문이 사라진 자리엔 찢긴 흔적만 남았다. 심지어 목차 부분엔 가위로 도려낸 흔적도 있었다.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확인한 1980년 6월 2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모습이다. 상황은 국립중앙도서관도 같았다. 찢겨나간 <뉴스위크>의 지면에는 1980년 5월의 광주가 기록돼 있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왜 이러한 모습의 <뉴스위크>가 보관돼 있는 걸까.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외신을 모두 검열했기 때문이다.
▲ 서울기록원이 오는 18일 최초로 전시하는 1980년 6월 2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당시 국내에 들어온 <뉴스위크>엔 해당 기사 부분이 잘려 나가 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언론 검열 때문이었다. ⓒ 서울기록원
하지만 이제는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오는 18일, 꼬박 40년 만에 잃어버린 기사 원본이 공개된다. 서울기록원에서 5.18민주화운동(아래 5.18) 40주년을 맞아 주최한 <넘어넘어 : 진실을 말하는 용기> 기획전에서다. 고아름 서울기록원 학예연구사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구할 수 없었던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면서 “해당 잡지를 갖고 있었던 해외 구매자와 수차례 접촉해 원본을 입수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7일 서울기록원을 통해 1980년 6월 2일자 <뉴스위크>의 사본 중 5.18이 보도된 부분을 확보했다. 해당 기사에는 광주의 참상·전두환 신군부가 자행한 폭력·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 등이 담겨 있다. <뉴스위크>는 기사 첫머리부터 “(5.18은) 6.25 전쟁 이후 한국에서 발생한 폭력사태 중 최악의 사건이었다”라며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비판을 가감 없이 적었다.
전두한 겨냥한 <뉴스위크>
▲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1980년 6월 2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목차 부분은 가위로 잘라낸 듯 훼손돼있고,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하는 6~10쪽이 잘려 나가있다. ⓒ 강연주
<뉴스위크>는 5.18 당시 시민군과 정부군의 대치 현장을 그리면서 “광주의 시위대는 자생적이었지만, 정부는 이를 ‘자극적인 선동가’ 또는 ‘북한에서 파견된 선동가’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당시 북한이 38선을 넘으려는 유혹에 빠질 위험은 당장 없어보였다”며 여론을 왜곡하려 한 전두환 신군부를 지적했다.
신군부를 두고는 “거의 모든 민주적인 통치의 흔적을 없애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라며 “퇴역 장성들이 장악한 새 내각에는 전두환의 정치적 견해가 반영됐다”고 전했다. 이어 “전두환의 권위주의적 행보는 한국의 국가 이미지와 경제를 위협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장군들(신군부) 밑에서 국가의 민주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신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기사를 갈무리했다.
“군부세력은 평화적으로 해결방안을 도출하기 위한 기회를 제 발로 차버렸다. (중략) 권력을 움켜쥐고자 하는 전두환씨는 완전한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위기가 장기화 되자, 전두환은 이틀 연속 같은 장소에서 잠을 자지 않고 자주 거처를 옮기기 시작했다.”
▲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1980년 6월 2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목차 부분에 5.18민주화운동 대한 언급(A Bloody Rebelion in Korea)이 있다. 하지만 해당 부분은 모두 찢겨져 나가있는 상태다. ⓒ 강연주
신군부의 언론 검열
하지만 당시 <뉴스위크>의 기사는 국내에 알려지지 못했다. 신군부가 국내에 유통되는 모든 외신 기사의 한국 관련 지면을 훼손하거나 삭제했기 때문이다.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뉴스위크> 원문이 손상돼있던 이유다.
당시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으로 한국(경기도 안양)에 있었던 빌 에이머스(Bill Amos)는 신군부가 자행한 언론 검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9일 <오마이뉴스>와 한 이메일 인터뷰에서 “당시 우리 자원봉사자들은 <타임>이나 <뉴스위크> 잡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우편 받아 볼 수 있었다”면서 “하지만 그 잡지들의 일부 문장이나 지면들은 지워져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어 “미국인인 우리는 그런 노골적인 언론 검열에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내가 놓치고 있는 정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며 “동시에 이런 언론 검열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안양) 밖에서(광주)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첫 징후 중 하나였다”고 밝혔다.
▲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1980년 6월 2일자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 내용 중 5.18민주화운동 부분이 잘려 나가 있다. ⓒ 강연주
간혹 신군부의 눈을 피해 검열을 거치지 않은 원문 잡지를 확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하거나 알릴 수 없었다. 빌 에이머스는 “서울 평화봉사단 사무실에서 누군가 검열 받지 않은 잡지와 신문을 확보했고, 관련 기사들을 복사해 벽에 붙였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복사해서 한국인에게 배포하는 것을 (한미 정부로부터) 엄격히 금지당했다”고 전했다.
국회도서관 관계자는 “찢겨진 것 자체도 역사”라고 말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한 언론 검열의 증거라는 의미다. 당시 <뉴스위크>뿐만 아니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도 1979~1980년 한국 관련 기사가 삭제된 채 유통됐다. 현재 국회도서관은 당시 삭제됐던 <타임>의 기사 일부를 확보해 놓은 상태다.
미국판과 국제판이 다른 이유
▲ 왼쪽은 1980년 6월 2일자 미국 시사주간지<뉴스위크>의 국제판으로 최근 서울기록원이 확보해 오는 18일 전시회에서 국내에 최초로 소개될 예정이다. 표지엔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 사진이 담겨 있다. 오른쪽은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것으로 당시 미국에서 유통되던 것이 한국에 검열돼 들어온 것이다. 국제판과 표지, 기사배치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 서울기록원, 강연주
서울기록원이 수집해 오는 18일 최초 공개하는 <뉴스위크>는 당시 주로 유럽에 유통됐던 국제판이다. 서울기록원은 해외 개인 소장자를 통해 1980년 6월 2일자 <뉴스위크> 국제판을 온전히 보관하고 있던 이로부터 해당 잡지를 구매했다.
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에 남아 있는 잡지는 미국 내에서 유통되던 것(미국판)이다. 서울기록원 측은 “당시 한국에는 <뉴스위크> 미국판이 들어왔다”라고 설명했다.
서울기록원이 입수한 국제판과 한국에 남아 있는 미국판은 표지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국제판 표지에는 1980년 5월 18일에 있었던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이, 미국판 표지에는 5.18이 담겨 있다. 국제판은 세인트헬레나산 화산폭발과 마이애미 폭동(5월 17~20일)을 각각 순서대로 보도했고 5.18 기사는 세 번째로 다뤘다. 미국판은 5.18을 첫 기사로 놓고 주요하게 다뤘다.
서울기록원은 오는 전시회에서 <뉴스위크>의 기사뿐만 아니라 5.18을 생생히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판본 10종, 5.18관련 자료집, 5.18 관련 해외 기사 등 다양한 기록물들을 공개할 예정이다.
[번역문] 대한민국 내 봉기
6.25전쟁 이후 한국에서 발생한 폭력사태 중 최악의 사건이었다. 전라도의 수도인 광주에서는 지난 주 20만 명의 저항세력이 한국의 군부세력의 중심에 있는 전두환 소장의 계엄령 시행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시위대는 자동차에 불을 지르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에 불을 질렀다. 또한 정부 건물을 점거하고 무기고를 급습한 뒤 약 4천 개의 무기와 4만 발의 탄약을 압수했다. 총검을 든 군대는 한 시민에게 직접적적으로 총격을 가했고, 격분한 무장단체는 버스와 택시를 징발하고 경찰 바리케이드를 들이받아 경찰관 4명이 숨졌다. 나흘간의 교전 끝에 시신 수는 61명으로 더 많은 유혈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존재한다.
광주 반란은 서울과 워싱턴을 전율시켰다. 시위대는 자생적이었지만 정부는 이를 ‘자극적인 선동가’ 또는 ‘북한에서 파견된 선동가’ 탓으로 돌렸다. 북한이 38선을 넘으려는 유혹에 빠질 위험은 당장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미 카터는 한국을 향해 두 대의 공군기를 보내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전두환은 2주 전 서울과 다른 도시에서 일어난 학생 폭동 이후 군사력을 강화함으로써 반격했다.
그는 대학들을 폐쇄했고 그의 주요 경쟁자들은 감금되었다. 내각의 일부 인사는 내각은 사임했고, 권력을 잡은 장군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내각이 설치됐다. 서울의 한 지식인은 “참극이 따로 없다... 한국은 이제 무법천지다”라고 답했다. 광주에서의 싸움은 지난 주 초, 계엄령 시행을 위해 전남대학교에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시작됐다.
목격자들은 적어도 한 명의 젊은 여성이 속옷까지 벗겨져 군인에 의해 끌려 다녔다고 말했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군 차량 뒤 거리를 누비던 학생들, 공원에 매달린 시신들에 대한 소문은 광주 전역에 퍼졌고 도시는 분노에 휩싸였다. 분노에 찬 수 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며 전두환의 퇴진을 요구하고 정부군과 싸웠다. 당초 시위대는 도끼와 쇠창살만 휘둘렀다. 그리고는 항복한 예비군들이 들고 있던 무기창고를 습격해 무기를 갈취했다. 소총, 기관총, 심지어 장갑차까지 갖춘 반군들은 정부군을 도시 외곽의 감옥이라는 하나의 요새로 다시 몰아갔다. 광주는 시위대의 것이었다.
사망자 수: 본 사태는 광주에서 전라남도 전체로 빠르게 번졌다. 폭동을 일으킨 시민들이 항구도시 목포 신항을 점거하고 나주의 경찰서와 군무기를 점거했다. 모두 16개 읍이 이번 소요로 피해를 입었다. 광주지역(인구 70만 명) 병원에서 집계한 기록에 따르면 61명이 사망하고 400명 가까운 부상자가 발생했다. 다른 의료기관들은 사망자 수를 훨씬 더 높게 보고 있다.
주중이 되자 정부군은 광주에서 철수했지만, 새로운 대대들이 그 도시를 에워쌌다. 박충훈 국무총리 권한대행은 정부가 위기상황에서 ‘최대의 인내’를 발휘하겠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방송했다. 반군은 시민, 종교, 학계 지도자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어 계엄사령부와 협상을 벌였다. 그들은 군인을 철수시키고, 체포된 수 백 명을 석방하며, 사망자와 부상자 가족에 대한 보상을 실시하고, 시민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기를 요구했다. 이후 정부는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 파괴된 건물의 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식량과 의료품을 들여올 수 있도록 하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주말이 되자 불안에 싸인 한적한 정적이 광주에 자리 잡았다.
이번 봉기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한국 내 정치적 양극화로 인해 이미 곤경에 처해 있던 카터 행정부를 경악시켰다. 지난주 서울에서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공범 4명이 살해 혐의로 교수형에 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비록 미국이 지렛대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는 행정부에 이 같은 탄압에 반대할 것을 촉구했다.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장관은 “이 시기 중에 우리는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관리들은 한국의 장군들이 독재를 멈추더라도 미군 철수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덧붙였다.
부정적인 성장: 전두환의 권위주의적인 행보는 한국의 국가 이미지와 경제를 위협했다. 올해 1분기 한국 경제가 16년 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이 20%를 훨씬 상회할 것이 확실해 보이며, 한국은 올해 민간 은행으로부터 빌리는 데 필요한 20억 달러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대출 조건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라고 서울에 있는 시카고 컨티넨탈 은행의 방문 경제학자 데이비드 매슬린은 말한다. “지분이 큰 대형은행들은 철수할 수 없지만 규모가 작은 은행들은 아예 시장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 이 같은 발언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 불안은 이미 높은 실업률과 더 많은 혼란의 잠재력을 불러일으키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을 겁먹게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서울의 장군들은 거의 모든 민주적인 통치의 흔적을 없애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들은 지난주 소집 예정이었던 새 국회 회기를 취소했다. 퇴역 장성들이 장악한 새 내각은 전두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반영했다. 지난주 최규하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관저 주변은 경비원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의 유일한 공개발언은 “정치발전을 위해 내가 한 공약에는 변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군대는 전두환의 정적 대부분을 검거했다. 야당 지도자이자 전라남도 출신인 김대중은 수감되었다. 그는 정쟁과 처형 위협으로 재판을 받을지도 모른다. 민주공화당(박정희 집권당)의 우파 총재 김종필도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자유주의 반체제 인사인 김영삼의 집은 김씨가 “계엄령 철폐 운동에서 극도의 폭력을 계획한 것”으로 고발된 후 군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의 아무도 공식적인 혐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이 체포의 진짜 이유는 전두환의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다.
지난주의 폭력사태가 전라남도에 국한된 동안, 다른 종류의 시위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 서울의 몇몇 신문사 기자들은 언론 검열에 항의하기 위해 취재를 거부하거나 직장을 그만두었다. 66명의 야당 의원 중 49명이 사퇴(다른 의원들 중 상당수는 잠적)했다. 수도의 학생 무장단체는 새로운 폭동을 일으킬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군대는 서울에서 시위를 비교적 쉽게 진압했다.
바리케이드: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장군들 밑에서 국가의 자유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신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 장교는 “민주주의와 안정 중 선택을 했다”고 운을 띄우며 “안정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광주 사태가 보여주듯이, 장군들은 한국 사회의 다른 중요한 분야를 소외시키기 위해서만 소수의 급진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평화적으로 해결방안을 도출하는 기회를 군부세력은 제 발로 차버렸고, 한국의 시민무장단체들은 그들의 불만을 바리케이드로 가져갈 가능성이 더 많아 보였다. 권력을 움켜쥐고자 하는 전두환은 완전히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위기가 장기화되자 그는 이틀 연속 같은 장소에서 잠을 자지 않으려고 자주 거처를 옮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앤드루 나고르스키, 존 닐슨
6.25전쟁 이후 한국에서 발생한 폭력사태 중 최악의 사건이었다. 전라도의 수도인 광주에서는 지난 주 20만 명의 저항세력이 한국의 군부세력의 중심에 있는 전두환 소장의 계엄령 시행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시위대는 자동차에 불을 지르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에 불을 질렀다. 또한 정부 건물을 점거하고 무기고를 급습한 뒤 약 4천 개의 무기와 4만 발의 탄약을 압수했다. 총검을 든 군대는 한 시민에게 직접적적으로 총격을 가했고, 격분한 무장단체는 버스와 택시를 징발하고 경찰 바리케이드를 들이받아 경찰관 4명이 숨졌다. 나흘간의 교전 끝에 시신 수는 61명으로 더 많은 유혈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존재한다.
광주 반란은 서울과 워싱턴을 전율시켰다. 시위대는 자생적이었지만 정부는 이를 ‘자극적인 선동가’ 또는 ‘북한에서 파견된 선동가’ 탓으로 돌렸다. 북한이 38선을 넘으려는 유혹에 빠질 위험은 당장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미 카터는 한국을 향해 두 대의 공군기를 보내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전두환은 2주 전 서울과 다른 도시에서 일어난 학생 폭동 이후 군사력을 강화함으로써 반격했다.
그는 대학들을 폐쇄했고 그의 주요 경쟁자들은 감금되었다. 내각의 일부 인사는 내각은 사임했고, 권력을 잡은 장군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내각이 설치됐다. 서울의 한 지식인은 “참극이 따로 없다... 한국은 이제 무법천지다”라고 답했다. 광주에서의 싸움은 지난 주 초, 계엄령 시행을 위해 전남대학교에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시작됐다.
목격자들은 적어도 한 명의 젊은 여성이 속옷까지 벗겨져 군인에 의해 끌려 다녔다고 말했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군 차량 뒤 거리를 누비던 학생들, 공원에 매달린 시신들에 대한 소문은 광주 전역에 퍼졌고 도시는 분노에 휩싸였다. 분노에 찬 수 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며 전두환의 퇴진을 요구하고 정부군과 싸웠다. 당초 시위대는 도끼와 쇠창살만 휘둘렀다. 그리고는 항복한 예비군들이 들고 있던 무기창고를 습격해 무기를 갈취했다. 소총, 기관총, 심지어 장갑차까지 갖춘 반군들은 정부군을 도시 외곽의 감옥이라는 하나의 요새로 다시 몰아갔다. 광주는 시위대의 것이었다.
사망자 수: 본 사태는 광주에서 전라남도 전체로 빠르게 번졌다. 폭동을 일으킨 시민들이 항구도시 목포 신항을 점거하고 나주의 경찰서와 군무기를 점거했다. 모두 16개 읍이 이번 소요로 피해를 입었다. 광주지역(인구 70만 명) 병원에서 집계한 기록에 따르면 61명이 사망하고 400명 가까운 부상자가 발생했다. 다른 의료기관들은 사망자 수를 훨씬 더 높게 보고 있다.
주중이 되자 정부군은 광주에서 철수했지만, 새로운 대대들이 그 도시를 에워쌌다. 박충훈 국무총리 권한대행은 정부가 위기상황에서 ‘최대의 인내’를 발휘하겠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방송했다. 반군은 시민, 종교, 학계 지도자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어 계엄사령부와 협상을 벌였다. 그들은 군인을 철수시키고, 체포된 수 백 명을 석방하며, 사망자와 부상자 가족에 대한 보상을 실시하고, 시민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기를 요구했다. 이후 정부는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 파괴된 건물의 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식량과 의료품을 들여올 수 있도록 하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주말이 되자 불안에 싸인 한적한 정적이 광주에 자리 잡았다.
이번 봉기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한국 내 정치적 양극화로 인해 이미 곤경에 처해 있던 카터 행정부를 경악시켰다. 지난주 서울에서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공범 4명이 살해 혐의로 교수형에 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비록 미국이 지렛대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는 행정부에 이 같은 탄압에 반대할 것을 촉구했다.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장관은 “이 시기 중에 우리는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관리들은 한국의 장군들이 독재를 멈추더라도 미군 철수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덧붙였다.
부정적인 성장: 전두환의 권위주의적인 행보는 한국의 국가 이미지와 경제를 위협했다. 올해 1분기 한국 경제가 16년 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이 20%를 훨씬 상회할 것이 확실해 보이며, 한국은 올해 민간 은행으로부터 빌리는 데 필요한 20억 달러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대출 조건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라고 서울에 있는 시카고 컨티넨탈 은행의 방문 경제학자 데이비드 매슬린은 말한다. “지분이 큰 대형은행들은 철수할 수 없지만 규모가 작은 은행들은 아예 시장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 이 같은 발언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 불안은 이미 높은 실업률과 더 많은 혼란의 잠재력을 불러일으키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을 겁먹게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서울의 장군들은 거의 모든 민주적인 통치의 흔적을 없애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들은 지난주 소집 예정이었던 새 국회 회기를 취소했다. 퇴역 장성들이 장악한 새 내각은 전두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반영했다. 지난주 최규하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관저 주변은 경비원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의 유일한 공개발언은 “정치발전을 위해 내가 한 공약에는 변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군대는 전두환의 정적 대부분을 검거했다. 야당 지도자이자 전라남도 출신인 김대중은 수감되었다. 그는 정쟁과 처형 위협으로 재판을 받을지도 모른다. 민주공화당(박정희 집권당)의 우파 총재 김종필도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자유주의 반체제 인사인 김영삼의 집은 김씨가 “계엄령 철폐 운동에서 극도의 폭력을 계획한 것”으로 고발된 후 군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의 아무도 공식적인 혐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이 체포의 진짜 이유는 전두환의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다.
지난주의 폭력사태가 전라남도에 국한된 동안, 다른 종류의 시위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 서울의 몇몇 신문사 기자들은 언론 검열에 항의하기 위해 취재를 거부하거나 직장을 그만두었다. 66명의 야당 의원 중 49명이 사퇴(다른 의원들 중 상당수는 잠적)했다. 수도의 학생 무장단체는 새로운 폭동을 일으킬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군대는 서울에서 시위를 비교적 쉽게 진압했다.
바리케이드: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장군들 밑에서 국가의 자유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신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 장교는 “민주주의와 안정 중 선택을 했다”고 운을 띄우며 “안정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광주 사태가 보여주듯이, 장군들은 한국 사회의 다른 중요한 분야를 소외시키기 위해서만 소수의 급진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평화적으로 해결방안을 도출하는 기회를 군부세력은 제 발로 차버렸고, 한국의 시민무장단체들은 그들의 불만을 바리케이드로 가져갈 가능성이 더 많아 보였다. 권력을 움켜쥐고자 하는 전두환은 완전히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위기가 장기화되자 그는 이틀 연속 같은 장소에서 잠을 자지 않으려고 자주 거처를 옮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앤드루 나고르스키, 존 닐슨
[영문] Insurrection in South Korea
It was an open insurrection the worst outbreak of violence in South Korea since the Korean War. In the southwestern city of Kwangju, the capital of South Cholla Province, 200,000 insurgents took to the streets last week to protest the imposition of martial law by South Korea's military strongman, Maj. Gen. Chon Too Hwan. The demonstrators torched cars, gutted radio and television stations, occupied government buildings, raided armories and seized an estimated 4,000 weapons and 40,000 rounds of ammunition. Troops with fixed bayonets fired point-blank into one crowd; a band of outraged militants commandeered buses and taxis and rammed through a police barricade, killing four policemen. After four days of pitched battles, the body count stood at 61 and even more bloodshed remained an ugly possibility.
The Kwangju rebellion sent shudders from Seoul to Washington. Though the demonstrators were homegrown, the government blamed it on “impure elements” and “North Korean agitators.” There seemed to be no imminent danger that North Korea would be tempted to cross the 38th parallel. But Jimmy Carter made the symbolic gesture of sending two airborne command-post planes toward Korea. Chon reacted by tightening the military grip he had clamped on South Korea two weeks ago after student riots in Seoul and other cities.
He kept the universities closed and his leading rivals locked up. The civilian Cabinet resigned; a new Cabinet acceptable to Chon's own clique of powerful generals was installed. “It's a tragedy,” said an intellectual in Seoul. “Korea is lawless now.”
The fighting in Kwangju began early last week when soldiers entered Chonnam National University to enforce the martial law decree on the student body. Eyewitnesses said at least one young woman was stripped to her underwear and dragged about by a soldier. Rumors of rape, of students pulled through the streets behind army vehicles, of bodies hanging in the parks, spread through Kwangju and the city exploded. Tens of thousands of rioting citizens filled the streets, demanding Chon's resignation and battling with government troops. Initially, the demonstrators wielded only axes and iron bars. Then they stormed an arms warehouse held by military reservists who surrendered and gave up their weapons. Armed with rifles, machine guns and even armored personnel carriers, the rebels drove other government forces back to a single stronghold: the prison outside the city. Kwangju belonged to the demonstrators.
Death Toll: The rebellion quickly spread from Kwangju to the rest of South Cholla, a rice-growing province at the southwestern tip of the peninsula. Rioting citizens took over the port city of Mokpo and occupied a police station and a military armory in Naju. In all, sixteen towns in the province were hit by disturbances. The hospitals in Kwangju alone (population: 700,000) reported 61 dead and nearly 400 wounded. Other medical sources put the death toll much higher.
By midweek, government forces had withdrawn from Kwangju, but fresh battalions surrounded the city. Acting Prime Minister Park Choong Hoon broadcast an appeal to the militants, saying that the government would exercise “maximum patience” in the crisis. The insurgents formed a committee of civic, religious and academic leaders to negotiate with the martial-law command. Among their demands: the withdrawal of all troops, release of hundreds of people arrested during the riots, compensation for the families of the dead and wounded and no government retaliation. The government later agreed in principle to provide compensation for the dead and wounded, to assume responsibility for the reconstruction of destroyed buildings and to allow in food and medical supplies. At the weekend, an uneasy quiet settled over Kwangju.
The uprising dismayed the Carter Administration, which was already troubled by the accelerating polarization in South Korea since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Park Chung Hee. In Seoul last week, there were reports that Kim Jae Kyu, former head of the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and four accomplices had been hanged for the killing, adding another violent note to the general clangor. Although the United States had little leverage, Ambassador William Gleysteen urged the Administration to oppose the crackdown. Secretary of State Edmund Muskie called for “restraint in this transition period.” U.S. officials added that there was no question of pulling out U.S. troops, even if the generals consolidated their dictatorship.
Negative Growth: Chon's authoritarian moves threatened South Korea's image and perhaps its economy. In the first quarter of this year, the Korean economy registered negative growth for the first time in sixteen years. Inflation seems certain to soar well above 20 per cent, and the country may not find the $2 billion it needs to borrow from private banks this year. “At a bare minimum, the terms for loans will get a lot tougher now,” says David Maslin, a visiting economist with the Continental Bank of Chicago in Seoul. “The big banks with major stakes can't withdraw, but smaller banks may drop out of the market altogether.” Korea's social unrest seemed likely to frighten off foreign investors, driving up an already high unemployment rate and the potential for even more turmoil.
Even so, the generals in Seoul seemed determined to eliminate nearly all vestiges of civilian rule. They canceled the new session of the National Assembly, which had been scheduled to convene last week. The new Cabinet, dominated by retired generals, reflected Chon's own political views. President Choi Kyu Hah was nearly invisible last week. His official residence was surrounded by guards, and his only public utterance was a written statement, claiming that there had been “no change in the pledge I have made for political development”.
The army rounded up most of Chon's political opponents. Opposition leader Kim Dae Jung, a native of South Cholla, was taken from his home, accused of paying out huge sums of money to finance “a people's uprising and the overthrow of the government”and jailed. He may face a trial for sedition and the threat of execution. Kim Jong Pil, the right-wing president of the Democratic Republican Party (the ruling party under Park Chung Hee) was also hauled off to jail for “illicit accumulation of a fortune.” And the home of liberal dissident Kim Young Sam was surrounded by troops after Kim was accused of planning “extreme violence in his campaign for the lifting of martial law.” Almost no one accepted the official charges at face value. The real reason for the arrests, most analysts believed, was to eliminate potential rivals to Chon, who is widely expected to groom one of his own supporters for the Presidency.
While last week's violence was confined to South Cholla, other types of protest broke out elsewhere. Reporters for several newspapers in Seoul either refused to carry out assignments or walked off their jobs to protest press censorship. Forty-nine of the 66 opposition members of the National Assembly resigned (many of the others went into hiding). The army easily put down a demonstration in Seoul, though the capital's student militants may be waiting for the right moment to launch their own new riots.
Barricades: Whatever happens next, few place much faith in the chances for significant liberalization under the generals. “We had the choice between democracy and stability,” a Korean officer said, “We chose stability.” But as the rebellion in Kwangju showed, the generals may have succeeded in clamping down on a few radicals only to alienate other vital sectors of Korean society. With avenues of peaceful dissent closed to them, Korea's militants seemed more likely to take their future grievances to the barricades. Having reached for total power, Chon may wind up with total chaos a danger he seemed to recognize. As the crisis wore on, he began moving his residence frequently trying not to sleep in the same place two nights in a row.
JOHN NIELSEN with ANDREW NAGORSKI in Seoul.
It was an open insurrection the worst outbreak of violence in South Korea since the Korean War. In the southwestern city of Kwangju, the capital of South Cholla Province, 200,000 insurgents took to the streets last week to protest the imposition of martial law by South Korea's military strongman, Maj. Gen. Chon Too Hwan. The demonstrators torched cars, gutted radio and television stations, occupied government buildings, raided armories and seized an estimated 4,000 weapons and 40,000 rounds of ammunition. Troops with fixed bayonets fired point-blank into one crowd; a band of outraged militants commandeered buses and taxis and rammed through a police barricade, killing four policemen. After four days of pitched battles, the body count stood at 61 and even more bloodshed remained an ugly possibility.
The Kwangju rebellion sent shudders from Seoul to Washington. Though the demonstrators were homegrown, the government blamed it on “impure elements” and “North Korean agitators.” There seemed to be no imminent danger that North Korea would be tempted to cross the 38th parallel. But Jimmy Carter made the symbolic gesture of sending two airborne command-post planes toward Korea. Chon reacted by tightening the military grip he had clamped on South Korea two weeks ago after student riots in Seoul and other cities.
He kept the universities closed and his leading rivals locked up. The civilian Cabinet resigned; a new Cabinet acceptable to Chon's own clique of powerful generals was installed. “It's a tragedy,” said an intellectual in Seoul. “Korea is lawless now.”
The fighting in Kwangju began early last week when soldiers entered Chonnam National University to enforce the martial law decree on the student body. Eyewitnesses said at least one young woman was stripped to her underwear and dragged about by a soldier. Rumors of rape, of students pulled through the streets behind army vehicles, of bodies hanging in the parks, spread through Kwangju and the city exploded. Tens of thousands of rioting citizens filled the streets, demanding Chon's resignation and battling with government troops. Initially, the demonstrators wielded only axes and iron bars. Then they stormed an arms warehouse held by military reservists who surrendered and gave up their weapons. Armed with rifles, machine guns and even armored personnel carriers, the rebels drove other government forces back to a single stronghold: the prison outside the city. Kwangju belonged to the demonstrators.
Death Toll: The rebellion quickly spread from Kwangju to the rest of South Cholla, a rice-growing province at the southwestern tip of the peninsula. Rioting citizens took over the port city of Mokpo and occupied a police station and a military armory in Naju. In all, sixteen towns in the province were hit by disturbances. The hospitals in Kwangju alone (population: 700,000) reported 61 dead and nearly 400 wounded. Other medical sources put the death toll much higher.
By midweek, government forces had withdrawn from Kwangju, but fresh battalions surrounded the city. Acting Prime Minister Park Choong Hoon broadcast an appeal to the militants, saying that the government would exercise “maximum patience” in the crisis. The insurgents formed a committee of civic, religious and academic leaders to negotiate with the martial-law command. Among their demands: the withdrawal of all troops, release of hundreds of people arrested during the riots, compensation for the families of the dead and wounded and no government retaliation. The government later agreed in principle to provide compensation for the dead and wounded, to assume responsibility for the reconstruction of destroyed buildings and to allow in food and medical supplies. At the weekend, an uneasy quiet settled over Kwangju.
The uprising dismayed the Carter Administration, which was already troubled by the accelerating polarization in South Korea since the assassination of President Park Chung Hee. In Seoul last week, there were reports that Kim Jae Kyu, former head of the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and four accomplices had been hanged for the killing, adding another violent note to the general clangor. Although the United States had little leverage, Ambassador William Gleysteen urged the Administration to oppose the crackdown. Secretary of State Edmund Muskie called for “restraint in this transition period.” U.S. officials added that there was no question of pulling out U.S. troops, even if the generals consolidated their dictatorship.
Negative Growth: Chon's authoritarian moves threatened South Korea's image and perhaps its economy. In the first quarter of this year, the Korean economy registered negative growth for the first time in sixteen years. Inflation seems certain to soar well above 20 per cent, and the country may not find the $2 billion it needs to borrow from private banks this year. “At a bare minimum, the terms for loans will get a lot tougher now,” says David Maslin, a visiting economist with the Continental Bank of Chicago in Seoul. “The big banks with major stakes can't withdraw, but smaller banks may drop out of the market altogether.” Korea's social unrest seemed likely to frighten off foreign investors, driving up an already high unemployment rate and the potential for even more turmoil.
Even so, the generals in Seoul seemed determined to eliminate nearly all vestiges of civilian rule. They canceled the new session of the National Assembly, which had been scheduled to convene last week. The new Cabinet, dominated by retired generals, reflected Chon's own political views. President Choi Kyu Hah was nearly invisible last week. His official residence was surrounded by guards, and his only public utterance was a written statement, claiming that there had been “no change in the pledge I have made for political development”.
The army rounded up most of Chon's political opponents. Opposition leader Kim Dae Jung, a native of South Cholla, was taken from his home, accused of paying out huge sums of money to finance “a people's uprising and the overthrow of the government”and jailed. He may face a trial for sedition and the threat of execution. Kim Jong Pil, the right-wing president of the Democratic Republican Party (the ruling party under Park Chung Hee) was also hauled off to jail for “illicit accumulation of a fortune.” And the home of liberal dissident Kim Young Sam was surrounded by troops after Kim was accused of planning “extreme violence in his campaign for the lifting of martial law.” Almost no one accepted the official charges at face value. The real reason for the arrests, most analysts believed, was to eliminate potential rivals to Chon, who is widely expected to groom one of his own supporters for the Presidency.
While last week's violence was confined to South Cholla, other types of protest broke out elsewhere. Reporters for several newspapers in Seoul either refused to carry out assignments or walked off their jobs to protest press censorship. Forty-nine of the 66 opposition members of the National Assembly resigned (many of the others went into hiding). The army easily put down a demonstration in Seoul, though the capital's student militants may be waiting for the right moment to launch their own new riots.
Barricades: Whatever happens next, few place much faith in the chances for significant liberalization under the generals. “We had the choice between democracy and stability,” a Korean officer said, “We chose stability.” But as the rebellion in Kwangju showed, the generals may have succeeded in clamping down on a few radicals only to alienate other vital sectors of Korean society. With avenues of peaceful dissent closed to them, Korea's militants seemed more likely to take their future grievances to the barricades. Having reached for total power, Chon may wind up with total chaos a danger he seemed to recognize. As the crisis wore on, he began moving his residence frequently trying not to sleep in the same place two nights in a row.
JOHN NIELSEN with ANDREW NAGORSKI in Seoul.
■ 뉴스위크 기사 번역 : 송재걸 (카디프대학 석사학위 논문 <The Gwangju Democratisation Movement and the Role of International News Flows> 저자)
출처 [단독] ‘난도질’ 뉴스위크 5.18 기사, 40년 만에 원본 찾았다
'세상에 이럴수가 > 정치·사회·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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