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자기 혐오 ‘반노동 정서’의 근원은
[경향신문] 주영재 기자 | 입력 : 2020.05.10 09:24
“힘든 경비아저씨를 위해서 아파트 주민들이 에어컨을 설치해줬다는 기사는 미담으로 소비되죠. 그런데 그 경비노동자들이 만약 노동조합을 결성해 에어컨 설치를 주장했다고 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누군가에 의해 시혜적으로 베풀어지느냐, 아니면 본인들이 권리를 주장해서 쟁취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태도가 나타납니다.”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
쌍용자동차의 마지막 복직자 35명이 지난 5월 4일 경기 평택공장에 출근했다. 정리해고에 맞선 10년 11개월에 걸친 싸움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뿌리 깊은 ‘반노동 정서’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복직을 알리는 기사는 반노동 정서에 기댄 온갖 혐오의 댓글로 뒤덮였다.
이창근 실장은 “댓글을 보면 사실 참혹하다”며 “실제 여론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가족이나 친척이 접하면 상처를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이들은 2009년 파업 당시는 물론 최근까지 언론의 왜곡 보도와도 싸워야 했다. <한국경제>는 지난 3월 17일 기사에서 2009년 당시 파업에 나섰던 쌍용차 노동자들이 시민과 장애인을 폭행했다고 보도했다가 최근 사실무근이라며 정정보도를 냈다.
지난해 10월 국회에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4개 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제출됐지만, 법안 심사도 이뤄지지 않은 채 20대 국회 종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31개국이 8개 핵심협약을 모두 비준했는데 우리나라는 미국과 함께 87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 98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다.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 위반 문제를 제기하자 뒤늦게 비준에 나섰지만, 여전히 반기업·친노동 행보라는 여론에 발이 묶여 있다. 쌍용차 파업 노동자들에게 국가와 회사가 청구한 100억 원대 손해배상 가압류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아서 임금으로 생활을 꾸리는 사람(임금노동자)을 뜻한다. 지난해 8월 기준 국내에 약 2,056만 명의 노동자가 있다. 그런데도 자신을 노동자로 칭하는 사람은 드물다. 노동자를 향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다.
노동자를 힘든 일을 하는 사람, 억압받고 박탈당한 불쌍한 사람,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도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집단행동을 하거나 경영진과의 교섭에 나서면 ‘너희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라며 탓한다.
반노동 정서는 노동 3권을 인정하지 않거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보는 태도다.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경제성장을 해치고, 사회에 혼란을 가져온다는 편견도 포함한다.
이런 반노동 정서의 기원은 가까이는 박정희 시대에 닿아 있다.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에 분단국가로서의 반공주의가 맞물려 ‘빨갱이’ 담론은 노동운동을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을 일정 부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경제위기가 파업 때문이라는 담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노동조합을 이기주의자로 매도하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귀족노조’ 담론이 대표적이다.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이 노동유연화를 한다면서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직을 양산하고, 그런 와중에 노동시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주로 대기업 정규직이다 보니 ‘귀족노조’라는 담론이 퍼지기 시작했다”며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이를 만들어 퍼뜨렸고, 언론 역시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영세·중소기업 노동자와 저학력·블루칼라 노동자들 사이에서 강한 반노조 태도가 나타나는 것도 노조가 대기업 정규직 중심으로 꾸려졌기 때문이다.
유형근 부산대 교수는 “회사나 일상생활에서 노조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반노조 정서가 약한데,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은 반노조주의가 강하게 나타난다”면서 “한국의 노동조합이 일부 대기업·공공 부문 같은 좋은 일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이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노동 정서가 대·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나뉜 노동시장의 이중성이 불평등을 키우면서 만들어낸 결과라는 의미다.
이창근 실장도 “1980~90년대까진 소위 노동자 싸움이 사회적 임금을 견인하는 측면이 있었는데 그게 어느 순간 단절되고 노동조합 투쟁과 현실의 노동자 처지가 괴리되다 보니 이 지점에서 공격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7년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한 유형근 교수는 당시 연구에서 사회적인 참여 활동이 늘고, 다양한 견해를 접할 기회가 확대되면 노조에 대한 혐오적인 태도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노동시간 단축, 시민교육 강화와 함께 정부가 노동조합을 공공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의 정당한 파트너로서 대우한다면 노동조합에 대한 반감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현재 11% 정도로 낮지만, 여성과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최근 노조 가입자가 늘어나면서 절대적 수치는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 노조의 단체협약 결과를 기업 바깥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이 더해질 필요가 있다. 노조의 권리 찾기를 이기주의적인 것으로 보이는 데 일조했던 기업별 교섭의 틀을 초(超)기업 단위로 넓히는 것이다.
장귀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부설 노동권연구소 소장은 “프랑스도 노조 조직률은 높지 않지만, 단체협약의 결과가 그 산업 전체나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에게도 적용된다”라면서 “우리도 산업별이든, 지역별이든 기업 단위를 넘어 단체협약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정희 연구위원은 “2017년 한국노동연구원이 노사관계에 관한 국민 인식조사를 했을 때 다수가 노조를 이기주의 집단이라고 여기면서도 90%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노조를 신뢰하고 노조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면서 “이런 모순적인 결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당시 조사에선 ‘앞으로 노조가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지’를 함께 물었는데 노조원만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취약계층 보호나 비정규직 문제 해결, 사회제도 개혁 등에서 더 노력하면 좋겠다는 답변이 많았다.
이 연구위원은 “노동 3권이 헌법에 있지만 실제로는 노조를 만든다고 하면 잘리기 십상이고 한편으로 아예 노동자가 아닌 사람으로 취급받는 사람도 많다”면서 “문재인 정부 이후 노조 조직률이 높아지는 걸 보면 전 사회적으로 노조를 설립해도 괜찮다는 정치권의 ‘노동존중’ 어나운스가 상당한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초·중등학교에서의 노동교육도 내실화할 필요가 있다. 이 위원은 “독일은 초등학교에서도 학급을 노측과 사측으로 반씩 나눠 단체교섭을 하도록 해 얼마나 합리적으로 요구하고 교섭에서 관철하는지를 가르친다”며 “우리 사회의 근간인 노동이 갖는 가치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실제 노사관계가 어떻게 형성·발전하는지를 학습하면 노동조합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권리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출처 노동자의 자기 혐오 ‘반노동 정서’의 근원은
[경향신문] 주영재 기자 | 입력 : 2020.05.10 09:24
▲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 등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중 마지막 복직자들이 5월 4일 경기도 평택시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출근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힘든 경비아저씨를 위해서 아파트 주민들이 에어컨을 설치해줬다는 기사는 미담으로 소비되죠. 그런데 그 경비노동자들이 만약 노동조합을 결성해 에어컨 설치를 주장했다고 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누군가에 의해 시혜적으로 베풀어지느냐, 아니면 본인들이 권리를 주장해서 쟁취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태도가 나타납니다.”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
쌍용자동차의 마지막 복직자 35명이 지난 5월 4일 경기 평택공장에 출근했다. 정리해고에 맞선 10년 11개월에 걸친 싸움이 일단락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뿌리 깊은 ‘반노동 정서’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복직을 알리는 기사는 반노동 정서에 기댄 온갖 혐오의 댓글로 뒤덮였다.
이창근 실장은 “댓글을 보면 사실 참혹하다”며 “실제 여론을 정확히 반영한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가족이나 친척이 접하면 상처를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이들은 2009년 파업 당시는 물론 최근까지 언론의 왜곡 보도와도 싸워야 했다. <한국경제>는 지난 3월 17일 기사에서 2009년 당시 파업에 나섰던 쌍용차 노동자들이 시민과 장애인을 폭행했다고 보도했다가 최근 사실무근이라며 정정보도를 냈다.
지난해 10월 국회에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4개 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제출됐지만, 법안 심사도 이뤄지지 않은 채 20대 국회 종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31개국이 8개 핵심협약을 모두 비준했는데 우리나라는 미국과 함께 87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 98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다.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 위반 문제를 제기하자 뒤늦게 비준에 나섰지만, 여전히 반기업·친노동 행보라는 여론에 발이 묶여 있다. 쌍용차 파업 노동자들에게 국가와 회사가 청구한 100억 원대 손해배상 가압류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들은 왜 ‘노동자’로 불리길 거부하나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아서 임금으로 생활을 꾸리는 사람(임금노동자)을 뜻한다. 지난해 8월 기준 국내에 약 2,056만 명의 노동자가 있다. 그런데도 자신을 노동자로 칭하는 사람은 드물다. 노동자를 향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다.
노동자를 힘든 일을 하는 사람, 억압받고 박탈당한 불쌍한 사람,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여기면서도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집단행동을 하거나 경영진과의 교섭에 나서면 ‘너희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라며 탓한다.
반노동 정서는 노동 3권을 인정하지 않거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보는 태도다.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경제성장을 해치고, 사회에 혼란을 가져온다는 편견도 포함한다.
이런 반노동 정서의 기원은 가까이는 박정희 시대에 닿아 있다.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에 분단국가로서의 반공주의가 맞물려 ‘빨갱이’ 담론은 노동운동을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을 일정 부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경제위기가 파업 때문이라는 담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노동조합을 이기주의자로 매도하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귀족노조’ 담론이 대표적이다.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이 노동유연화를 한다면서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직을 양산하고, 그런 와중에 노동시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주로 대기업 정규직이다 보니 ‘귀족노조’라는 담론이 퍼지기 시작했다”며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이를 만들어 퍼뜨렸고, 언론 역시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영세·중소기업 노동자와 저학력·블루칼라 노동자들 사이에서 강한 반노조 태도가 나타나는 것도 노조가 대기업 정규직 중심으로 꾸려졌기 때문이다.
유형근 부산대 교수는 “회사나 일상생활에서 노조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반노조 정서가 약한데,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은 반노조주의가 강하게 나타난다”면서 “한국의 노동조합이 일부 대기업·공공 부문 같은 좋은 일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이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노동 정서가 대·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나뉜 노동시장의 이중성이 불평등을 키우면서 만들어낸 결과라는 의미다.
이창근 실장도 “1980~90년대까진 소위 노동자 싸움이 사회적 임금을 견인하는 측면이 있었는데 그게 어느 순간 단절되고 노동조합 투쟁과 현실의 노동자 처지가 괴리되다 보니 이 지점에서 공격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단체협약 적용 범위 기업 밖으로 넓혀야
2017년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한 유형근 교수는 당시 연구에서 사회적인 참여 활동이 늘고, 다양한 견해를 접할 기회가 확대되면 노조에 대한 혐오적인 태도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노동시간 단축, 시민교육 강화와 함께 정부가 노동조합을 공공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의 정당한 파트너로서 대우한다면 노동조합에 대한 반감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현재 11% 정도로 낮지만, 여성과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최근 노조 가입자가 늘어나면서 절대적 수치는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 노조의 단체협약 결과를 기업 바깥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이 더해질 필요가 있다. 노조의 권리 찾기를 이기주의적인 것으로 보이는 데 일조했던 기업별 교섭의 틀을 초(超)기업 단위로 넓히는 것이다.
장귀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부설 노동권연구소 소장은 “프랑스도 노조 조직률은 높지 않지만, 단체협약의 결과가 그 산업 전체나 조합원이 아닌 노동자에게도 적용된다”라면서 “우리도 산업별이든, 지역별이든 기업 단위를 넘어 단체협약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정희 연구위원은 “2017년 한국노동연구원이 노사관계에 관한 국민 인식조사를 했을 때 다수가 노조를 이기주의 집단이라고 여기면서도 90%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노조를 신뢰하고 노조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면서 “이런 모순적인 결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당시 조사에선 ‘앞으로 노조가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을지’를 함께 물었는데 노조원만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취약계층 보호나 비정규직 문제 해결, 사회제도 개혁 등에서 더 노력하면 좋겠다는 답변이 많았다.
이 연구위원은 “노동 3권이 헌법에 있지만 실제로는 노조를 만든다고 하면 잘리기 십상이고 한편으로 아예 노동자가 아닌 사람으로 취급받는 사람도 많다”면서 “문재인 정부 이후 노조 조직률이 높아지는 걸 보면 전 사회적으로 노조를 설립해도 괜찮다는 정치권의 ‘노동존중’ 어나운스가 상당한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초·중등학교에서의 노동교육도 내실화할 필요가 있다. 이 위원은 “독일은 초등학교에서도 학급을 노측과 사측으로 반씩 나눠 단체교섭을 하도록 해 얼마나 합리적으로 요구하고 교섭에서 관철하는지를 가르친다”며 “우리 사회의 근간인 노동이 갖는 가치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실제 노사관계가 어떻게 형성·발전하는지를 학습하면 노동조합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권리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출처 노동자의 자기 혐오 ‘반노동 정서’의 근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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