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에 밝혀진 '여만철 가족 귀순사건' 진실
[단독] 군함 밀입국→ 홍콩 출국→ 재입국... 안기부는 왜 그랬을까
[오마이뉴스] 김도균, 이희훈 | 14.02.25 14:12 | 최종 업데이트 14.02.26 14:12
지난 1994년 4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만철씨 일가족 망명 사건에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아래 안기부, 국가정보원의 전신)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이 20년 만에 드러났다.
특히 안기부는 해군 함정까지 동원해 이미 여씨 일가족을 국내로 데리고 왔으면서도, 이런 사실을 감추고 이들을 다시 해외로 출국시켰다가 김포공항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언론에 공개해 일가족 귀순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과거에도 정보기관이 정치적 의도로 공작차원에서 탈북자들의 망명에 개입해 상황을 극적으로 연출했다는 지적이 여러 번 제기됐지만, 입국과정에서 정보조작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994년 4월 30일 오후 1시 10분, 서울 김포공항 입국장. 100여 명의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이날 홍콩발 대한항공 618편으로 김포에 도착한 승객 중에는 북한 사회안전부(우리의 경찰에 해당) 대위 출신의 여만철(당시 48세)씨 일가족이 포함돼 있었다.
일반 승객들이 다 빠져 나간 후 상기된 표정으로 취재진 카메라 앞에선 사람들은 여씨를 포함하여 부인 이옥금(45·함흥 도시경영사업소유치원 전 원장)씨, 장녀 금주(20·유치원 교사)씨, 장남 금룡(18·고등중6)·차남 은룡(16·고등중4)군 등 모두 5명.
이는 통상적으로 탈북자들의 입국 현장을 공개하지 않고 기자회견을 통해 귀순사실을 공개해오던 다른 사례들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연합뉴스>는 현장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입국장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여씨 가족들은 취재에 열을 올리던 보도진과 이를 제지하는 공항기관원들에 떠밀려 뿔뿔이 흩어지는 등 한바탕 곤욕을 치르기도. 이날 공항 관계자들과 여행객들은 여씨 가족들이 취재진 및 보안기관원들에 휩싸여 곤욕을 치르는 것을 지켜보고 "간단히 기자회견을 하면 될 것을 왜 일을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촌평. 공항공단 관계자는 "과거 귀순자가 입국할 때는 귀빈통로를 이용, 입국절차를 밟은 뒤 약식 기자회견을 하곤 했다"면서 "취재경쟁이 벌어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여씨 가족이 도착하자마자 언론에 공개한 것은 혼란을 자초한 셈"이라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 <연합> 1994.4.30
이날 공항에서의 약식 기자회견은 없었다. 다만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여씨는 "꿈에 그리던 남한에 오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3월18일 압록강이 얼어붙은 틈을 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건너간 뒤 조선족 동포의 도움으로 남한 정부에 망명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입국경로를 묻는 질문에는 "너무 가슴이 설레 지금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짧게 답변하곤 안기부 요원들에 이끌려 공항을 빠져나갔다.
이날 안기부는 여씨 가족들이 주홍콩 영사관에서 임시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일반 여행승객들과 같은 입국절차를 거쳐 입국했다고 설명했다.
여씨 일가족은 이틀 뒤인, 5월 2일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모습을 나타냈다. 북한 주민의 가족단위 망명은 1987년 2월 김만철씨 일가족 11명이 일본과 대만을 거쳐 입국한데 이어 2번째여서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기자회견에서 여씨는 "계속된 식량난으로 먹고살기가 너무 어려워 귀순을 결심했다"면서 자신들이 살았던 함경남도 함흥시의 경우 극심한 식량난으로 이웃들이 굶어 죽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부인 이씨도 "주로 강냉이를 풀처럼 쑤어 죽으로 끼니를 때워 왔으며 자녀들이 '강냉이죽 한 그릇 없느냐'고 물어올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고 답변하다 끝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망명경로에 대해 여씨는 "3월 18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한 뒤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 조선족 김아무개씨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 체류하다 제3국을 통해 귀순했다"고 공항에서의 설명을 되풀이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여만철 일가 귀순'사건의 전말이다.
최근 기자는 믿을 만한 취재원으로부터 이 사건에 숨겨진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여만철씨 일가족의 망명을 당시 안기부가 주도했으며, 중국 어선과 한국 군함을 동원해 이미 국내로 데리고 들어왔던 여씨 가족들을 다시 홍콩으로 출국시켰다가 김포공항을 통해 귀순하는 장면을 연출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여씨 가족을 수소문했다. 여만철씨는 지난 2005년 고인이 됐고, 장남 금룡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가 어렵게 털어 놓은 사실은 실로 놀라웠다. 식량난에 시달리다 남한행을 결심했던 망명 동기는 이전에 밝힌 것과 같았지만, 한국으로 들어온 과정은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달랐다.
금룡씨의 진술에 의하면 그의 가족들은 1994년 3월 18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온 뒤, 조선족 동포의 도움으로 심양의 한 한국기업을 찾아가게 된다. 기업관계자의 주선으로 북경 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 간 것이 3월 25일께다.
다음은 기자와 금룡씨와의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망명의사를 밝혔을 때 대사관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중국으로 탈출한 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모두 작은 칼을 하나씩 나눠주셨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끌려가서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찾아갔던 대사관 관계자가 '지금은 합법적으로 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본국에 연락해서 방법을 만들 테니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대사관까지만 가면 바로 한국으로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는데, 그런 말을 듣고한참동안을 우셨다. 당시 심양에는 북한에서 나온 주재원들이 많았는데, 다시 그곳으로 가야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했겠나. 그래도 별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심양으로 돌아가서 우리를 도와준 한국기업의 조선족 운전사 집에서 20여 일을 보냈다."
- 그 후 입국 경위를 말해 달라.
"4월 23일께 그 조선족 운전사가 한국에 가게 되었다면서 승합차에 우리 가족 모두를 싣고 심양을 떠났다. 1박2일을 달려서 중국 어느 해안도시에 있는 호텔에 우리를 내려주었는데, 그곳에서 자신을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이라고 소개한 사람을 만났다.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젊은 직원 두 사람을 따라 어느 아파트로 들어갔더니, 갈아입을 새 옷을 주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진 후에 부두에 있는 중국 어선으로 데려가더니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도 절대 나오면 안 된다'는 주의를 주면서 어창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곳에는 우리 가족 말고도 다른 탈북자 세 명이 더 있었다."
- 다른 탈북자들은 누구였는가.
"내 나이 또래의 광철·광일씨 형제와 북한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는 30대 남자분인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 그렇게 8명이 중국 어선에 숨어서 한국까지 온 것인가.
"아니다. 모두들 엄청나게 배 멀미를 하면서 바다로 나갔는데, 얼마쯤 갔는지 배가 멈추었다. 그러더니 중국인 선원들이 '이제는 나와도 된다'고 했다. 나와 봤더니 망망대해에 배가 서 있었고 선원들은 카드를 치고 있었다. '왜 한국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조금 있으면 다른 배가 우리를 데리러 온다는 거였다. 그리고 날이 캄캄해진 후, 엄청난 크기의 군함이 우리가 탄 어선 옆에 와서 서더라. 그 배에서 내려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좀 나이 든 관계자가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 배부터는 대한민국 영토니 안심해도 된다'고 우리를 맞아주었다. 군함에서 다른 탈북자들과 우리 가족들은 따로 수용됐다."
- 한국에 들어온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는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4월 28일 새벽이었다. 아마도 인천항이었을 걸로 짐작은 하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그곳에서 창밖이 보이지 않는 승합차를 타고 어느 아파트에 도착했다. 거기엔 안기부 남·녀 직원이 2명 있었는데, 우리 가족들에게 A4용지 한 장씩을 나눠주더니 태어나서 한국에 들어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적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승용차 두 대에 우리 가족을 나눠 타게 하고 어디론가 향했는데, 창밖으로 인상적인 폭포가 하나 보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양화대교 인공폭포였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김포공항이었다. 그곳에서 일반 여행객들이 없는 곳으로 우리 가족들을 데려가더니 여권들을 하나씩 나눠줬다. 안기부 요원이 자신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고 하면서 출국 수속을 밟는 요령을 가르쳐 주고는 우리가족을 다시 홍콩행 비행기에 태웠다."
- 한국으로 들어온 바로 다음날 출국을 했다는 건데 이상하지 않았나.
"아마도 부모님들과는 미리 이야기가 된 것 같았지만, 나와 형제들은 왜 또 외국으로 나가라고 하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출국 과정에서 안기부 요원 두 명이 우리 가족과 동행했는데, 비행기를 타고나니 여권들을 다시 거둬갔다. 홍콩에 도착하고 나선 또다른 요원들이 합류해서 어느 호텔로 우리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내일이면 진짜 한국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거다.
내가 물어봤다. '왜 이렇게 왔다갔다 해야하는 거냐'고. 그랬더니 다른 탈북자들도 우리 가족들과 '같은 귀순 루트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 루트가 밝혀지면 안 된다'고 했다. 또 '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는 사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발설해선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리고 비밀을 지키겠다는 각서를 가져와서는 우리 식구 모두에게 지장을 찍게 했다. 그러면서 농담처럼 '당신들, 북한에 있을 때 우리(안기부) 얘기 들었잖아, 우린 무서운 사람들이야'라고 했는데, 당시 상황에선 웃고 넘길 수만은 없었다."
- 그날 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탄 것인가.
"아니다. 호텔에서 1박을 하면서 몇 가지 주의사항들을 교육시켰다. 이제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기자들이 많이 나와 있을 텐데, 기자들이 무엇을 물어보더라도 '지금 정신이 없어서 모르겠다'는 한마디만 하라고, '불필요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4월 30일 여씨 일가족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안기부가 사전에 마련해둔 각본 대로 언론은 김포공항에 도착한 일가족 귀순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의 입국경로가 공개되지 않고 '제3국을 통한 귀순' 정도로 소개되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다면 금룡씨의 진술을 신뢰할 수 있을까. 물론 당사자가 털어놓은 말이니만큼 진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확인과정이 필요했다. 기자는 금룡씨의 진술에 등장하는, 중국어선에서 만났다는 또 다른 탈북자 3인을 주목했다.
실마리는 어렵지 않게 풀렸다. 바로 금룡씨가 이야기했던 광철씨 형제의 존재가 단서가 됐다. 여씨 일가족이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일주일 후인 5월 7일 안기부는 북한주민 세 사람의 귀순사실을 발표했다. 탄광 채탄공 황광철(20)·광호(18)씨 형제와 북한 원자력공업부 남천화학연합기업소 작업반장 김대호(35)씨가 제3국을 통해 각각 망명해왔다고 밝혔던 것이다.
이어 9일 열린 세 사람의 기자회견에서 황씨 형제는 귀순경로에 대해 "(중국) 모 항구에 남한 배가 자주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 달간 정찰 끝에 남한 배를 발견, 몰래 올라탔다"고 밝혔다.
황씨 형제는 금룡씨의 진술에서 이미 등장하고 있고, 금룡씨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30대 탈북자는 바로 김대호씨일 가능성이 높았다. 취재 결과 북한 영변 핵 단지내 우라늄 정련공장 기동예술 선전대 작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김씨가 망명 후 여러 권의 책을 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김씨는 지난 2001년 자신의 탈북 과정과 남한 정착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는 여씨 일가족과 관련된 결정적인 언급이 있다.
"해안도시(위해)에 도착한 것은 오후 다섯시가 지나서였다. 그 도시의 어느 아지트에서 한 가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은 40대 중년의 부부와 20대 초반의 딸, 10대의 두 아들이 있었다. 인솔자는 그 가족의 딸과 내가 당분간은 부부로 가장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어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며 자기소개를 간단히 했다. 여만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가족의 가장은 작은 키에 날카롭게 생긴 사람이었다. (중략)
배가 공해에 이르러 우리는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갑판으로 나왔는데, 큰 군함이 배 앞에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군함에 올랐다.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자유 세계로 인계되는 순간이었다. 군함 갑판 위에서 나이 지긋한 분이 나를 마중하며 말했다. '이젠 안심하세요, 여기는 대한민국 영토의 한 부분입니다.' 이어 널찍한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거기에는 우리 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차려진 푸짐한 식탁이 기다리고 있었다." -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15~117페이지
금룡씨의 증언과 김씨의 책은 처음 만난 장소(금룡씨 - 어선 선창, 김씨 - 위해의 아지트)와 한국 입국 시점(금룡씨 - 4월 28일 새벽, 김씨 - 4월 27일 새벽 2시께) 등 일부 부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중국 어선과 한국 군함을 통해 처음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금룡씨의 진술은 책의 내용과 일치한다. 외교적 마찰을 무릅쓰고 중국 어선을 이용해 탈북자들을 공해상으로 내보낸 후 군함까지 동원해 이들을 데리고 왔다는 사실은, 당시 안기부가 여씨 일가족 등의 입국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당시 안기부는 왜 이미 한국으로 데려왔던 여씨 일가족을 다시 홍콩으로 출국시켰다가 김포공항으로 재입국시키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을까. 여씨 가족에게 설명한 대로 입국루트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다른 탈북자들의 경우처럼 아예 언급 자체를 하지 않도록 하면 된다. 왜 굳이 김포공항에 기자들을 불러놓고 입국하는 과정을 공개했을까? 여기엔 다분히 의도성이 엿보인다.
이 대목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씨의 증언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안기부가 불법도청팀인 '미림팀'을 조직해 사회 유력인사들을 대상으로 불법 도·감청을 실시했다고 2005년 폭로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지난 2010년 8월 출판된 김씨의 책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에는 YS정권 시절 안기부 귀순공작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 있다.
그는 1993년 출범했던 문민정부가 전국 각지에서 연이어 터지기 시작한 사고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뉴스로 뉴스를 덮는" 방식의 공작을 시도했다고 증언했다. 김씨가 든 대표적 사례가 바로 조창호 소위의 귀순이다.
"1994년 10월 멀쩡하던 성수대교가 어느 날 아침 중간이 끊어져 내려앉으면서 수 십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부랴부랴 묘책을 찾아야 했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더 큰 뉴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탈북 국군포로였던 조창호 소위를 데려 오는 것이었다. 사실 안기부는 애초부터 조창호 소위가 탈북해서 중국을 통해 귀환을 시도하고 있던 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여 그저 팔짱만 끼고 지켜보고만 있었다.(중략)
당초 조 소위 일행은 조그만 통통배를 이용하여 서해를 건너려고 시도했다. 첫 번째 시도는 파도가 너무 높아 실패하고 말았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풍랑으로 인해 배가 실종되고 만다. 김덕 부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창호 소위를 살려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안기부는 수산청의 어업 지도선을 총 동원해서 서해를 이잡듯이 뒤졌다. 수색작업은 수산청을 담당하던 최모 서기관이 주도했다. 총력을 기울여 수색한 끝에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사흘 만에 조 소위를 구출해 낼 수 있었다. 정부는 즉각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거창한 환영식을 베풀었다. 이렇게 하여 국군포로 출신 탈북자 1호가 탄생한 것이었다." -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 234~235페이지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비판여론을 덮기 위한 목적으로 안기부가 조창호 소위의 귀순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실제 1994년 10월 24일 안기부는 "6·25전쟁에 포병 소위로 참전했다 포로가 돼 납북된 조창호(64)씨가 북한을 탈출해 군산 서남방 80마일 바다에서 표류하다 우리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구출됐다"고 발표했다. 이날은 성수대교가 무너져 많은 시민이 사망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렇다면 조창호 소위가 귀환하기 약 반 년 전 있었던 여만철씨 일가족 귀순 사건 전후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안기부가 여씨 일가족 귀순 소식으로 덮어야 할 뉴스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기자는 여씨 일가족이 비밀리에 한국에 입국한 1994년 4월 28일 전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뉴스 라이브러리를 검색했다.
4월 27일 <한겨레>는 1면에서 "김현철씨 쪽에 1억여 원 줬다" 제하의 기사에서 한약업사 정재중씨가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의 아들 김현철씨에게 무면허 한약업사들을 구제해달라는 조건으로 정치자금 1억2000만 원을 건네주었다고 폭로했다. 이어 28, 29, 30일 <한겨레>는 연일 대통령 아들 김현철씨의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1면에 보도했다. 같은 시간 여만철씨 일가족은 비밀리에 입국-홍콩 출국-김포 재입국의 이상한 경로를 밟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김현철씨는 '소통령'으로 불리며 아버지 YS와는 정치적 동지관계로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의 힘은 바로 안기부에서 나왔다. 안기부의 예산과 인사를 조정하는 기조실장 자리에 측근 김기섭씨를 앉히고 안기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현철씨의 국정개입 비화에 대해 한 안기부 간부의 증언에서 당시 안기부 내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현철씨는 김기섭 실장을 통해 안기부를 수족처럼 움직였습니다. 안기부장은 한마디로 허수아비였어요. 김 실장은 권영해 부장과 회의를 하면서도 '이건 소산(김현철씨의 아호)의 뜻'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습니다. 한약업사 사건 때는 관계부서장 회의에서 느닷없이 현철씨 얘길 꺼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아들이 돈을 받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구요. 김 실장은 그렇게 자기 뒤에 현철씨가 있다는 걸 떠들고 다녔습니다." - <경향> 1998년 6월 1일 자
안기부가 지난 1994년 과연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여만철씨 일가족의 망명 경로를 연출·조작했는지에 대해선 국정원이 입을 다물고 있는 한 정확한 의도를 확인하기 쉽지 않다. 다만 정보기관이 탈북자들의 급박한 상황을 이용해 국내 정치용으로 이들의 귀순을 이용했다는 비판만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지난 1994년 여씨 일가족보다 약 4개월 늦게 남한으로 입국한 김형덕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장은 한국 망명을 위해 북경, 청도, 베트남 등지의 한국 공관에 입국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김 소장은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한국 정보기관은 탈북자들 중에 정치적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들은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그래서 북한에서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일반 탈북자들은 한국공관에서 문전박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여만철씨 가족의 경우 일가족 5명이 한꺼번에 넘어왔다는 측면에서 활용가치가 있었을 것"이라면서 "국정원(안기부)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탈북자 입국을 이용했던 사례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오마이뉴스>는 24일 오전 국정원에 관련내용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25일 현재까지 답변이 오지 않았다.
출처 : 20년만에 밝혀진 '여만철 가족 귀순사건' 진실
[단독] 군함 밀입국→ 홍콩 출국→ 재입국... 안기부는 왜 그랬을까
[오마이뉴스] 김도균, 이희훈 | 14.02.25 14:12 | 최종 업데이트 14.02.26 14:12
▲ 여만철씨 가족이 1994년 4월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는 모습. ⓒ 연합뉴스 |
지난 1994년 4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만철씨 일가족 망명 사건에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아래 안기부, 국가정보원의 전신)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이 20년 만에 드러났다.
특히 안기부는 해군 함정까지 동원해 이미 여씨 일가족을 국내로 데리고 왔으면서도, 이런 사실을 감추고 이들을 다시 해외로 출국시켰다가 김포공항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언론에 공개해 일가족 귀순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과거에도 정보기관이 정치적 의도로 공작차원에서 탈북자들의 망명에 개입해 상황을 극적으로 연출했다는 지적이 여러 번 제기됐지만, 입국과정에서 정보조작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만철 일가족 귀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지난 1994년 4월 30일 오후 1시 10분, 서울 김포공항 입국장. 100여 명의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이날 홍콩발 대한항공 618편으로 김포에 도착한 승객 중에는 북한 사회안전부(우리의 경찰에 해당) 대위 출신의 여만철(당시 48세)씨 일가족이 포함돼 있었다.
일반 승객들이 다 빠져 나간 후 상기된 표정으로 취재진 카메라 앞에선 사람들은 여씨를 포함하여 부인 이옥금(45·함흥 도시경영사업소유치원 전 원장)씨, 장녀 금주(20·유치원 교사)씨, 장남 금룡(18·고등중6)·차남 은룡(16·고등중4)군 등 모두 5명.
이는 통상적으로 탈북자들의 입국 현장을 공개하지 않고 기자회견을 통해 귀순사실을 공개해오던 다른 사례들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 <연합뉴스>는 현장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입국장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여씨 가족들은 취재에 열을 올리던 보도진과 이를 제지하는 공항기관원들에 떠밀려 뿔뿔이 흩어지는 등 한바탕 곤욕을 치르기도. 이날 공항 관계자들과 여행객들은 여씨 가족들이 취재진 및 보안기관원들에 휩싸여 곤욕을 치르는 것을 지켜보고 "간단히 기자회견을 하면 될 것을 왜 일을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촌평. 공항공단 관계자는 "과거 귀순자가 입국할 때는 귀빈통로를 이용, 입국절차를 밟은 뒤 약식 기자회견을 하곤 했다"면서 "취재경쟁이 벌어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여씨 가족이 도착하자마자 언론에 공개한 것은 혼란을 자초한 셈"이라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 <연합> 1994.4.30
이날 공항에서의 약식 기자회견은 없었다. 다만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여씨는 "꿈에 그리던 남한에 오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3월18일 압록강이 얼어붙은 틈을 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건너간 뒤 조선족 동포의 도움으로 남한 정부에 망명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입국경로를 묻는 질문에는 "너무 가슴이 설레 지금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짧게 답변하곤 안기부 요원들에 이끌려 공항을 빠져나갔다.
이날 안기부는 여씨 가족들이 주홍콩 영사관에서 임시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일반 여행승객들과 같은 입국절차를 거쳐 입국했다고 설명했다.
여씨 일가족은 이틀 뒤인, 5월 2일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모습을 나타냈다. 북한 주민의 가족단위 망명은 1987년 2월 김만철씨 일가족 11명이 일본과 대만을 거쳐 입국한데 이어 2번째여서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다.
기자회견에서 여씨는 "계속된 식량난으로 먹고살기가 너무 어려워 귀순을 결심했다"면서 자신들이 살았던 함경남도 함흥시의 경우 극심한 식량난으로 이웃들이 굶어 죽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부인 이씨도 "주로 강냉이를 풀처럼 쑤어 죽으로 끼니를 때워 왔으며 자녀들이 '강냉이죽 한 그릇 없느냐'고 물어올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고 답변하다 끝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망명경로에 대해 여씨는 "3월 18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한 뒤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 조선족 김아무개씨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 체류하다 제3국을 통해 귀순했다"고 공항에서의 설명을 되풀이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여만철 일가 귀순'사건의 전말이다.
최근 기자는 믿을 만한 취재원으로부터 이 사건에 숨겨진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여만철씨 일가족의 망명을 당시 안기부가 주도했으며, 중국 어선과 한국 군함을 동원해 이미 국내로 데리고 들어왔던 여씨 가족들을 다시 홍콩으로 출국시켰다가 김포공항을 통해 귀순하는 장면을 연출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여씨 가족을 수소문했다. 여만철씨는 지난 2005년 고인이 됐고, 장남 금룡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가 어렵게 털어 놓은 사실은 실로 놀라웠다. 식량난에 시달리다 남한행을 결심했던 망명 동기는 이전에 밝힌 것과 같았지만, 한국으로 들어온 과정은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달랐다.
금룡씨의 진술에 의하면 그의 가족들은 1994년 3월 18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온 뒤, 조선족 동포의 도움으로 심양의 한 한국기업을 찾아가게 된다. 기업관계자의 주선으로 북경 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 간 것이 3월 25일께다.
군함으로 입국 → 홍콩 출국 → 김포공항 입국
▲ 94년 아버지 여만철씨와 함께 귀순한 여금룡씨가 21일 오전 서울 노원구 한 카페에서 당시 안기부의 귀순공작 의혹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 이희훈 |
다음은 기자와 금룡씨와의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망명의사를 밝혔을 때 대사관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중국으로 탈출한 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모두 작은 칼을 하나씩 나눠주셨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끌려가서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찾아갔던 대사관 관계자가 '지금은 합법적으로 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본국에 연락해서 방법을 만들 테니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대사관까지만 가면 바로 한국으로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는데, 그런 말을 듣고한참동안을 우셨다. 당시 심양에는 북한에서 나온 주재원들이 많았는데, 다시 그곳으로 가야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했겠나. 그래도 별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심양으로 돌아가서 우리를 도와준 한국기업의 조선족 운전사 집에서 20여 일을 보냈다."
- 그 후 입국 경위를 말해 달라.
"4월 23일께 그 조선족 운전사가 한국에 가게 되었다면서 승합차에 우리 가족 모두를 싣고 심양을 떠났다. 1박2일을 달려서 중국 어느 해안도시에 있는 호텔에 우리를 내려주었는데, 그곳에서 자신을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이라고 소개한 사람을 만났다.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젊은 직원 두 사람을 따라 어느 아파트로 들어갔더니, 갈아입을 새 옷을 주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진 후에 부두에 있는 중국 어선으로 데려가더니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도 절대 나오면 안 된다'는 주의를 주면서 어창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곳에는 우리 가족 말고도 다른 탈북자 세 명이 더 있었다."
- 다른 탈북자들은 누구였는가.
"내 나이 또래의 광철·광일씨 형제와 북한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는 30대 남자분인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 그렇게 8명이 중국 어선에 숨어서 한국까지 온 것인가.
"아니다. 모두들 엄청나게 배 멀미를 하면서 바다로 나갔는데, 얼마쯤 갔는지 배가 멈추었다. 그러더니 중국인 선원들이 '이제는 나와도 된다'고 했다. 나와 봤더니 망망대해에 배가 서 있었고 선원들은 카드를 치고 있었다. '왜 한국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조금 있으면 다른 배가 우리를 데리러 온다는 거였다. 그리고 날이 캄캄해진 후, 엄청난 크기의 군함이 우리가 탄 어선 옆에 와서 서더라. 그 배에서 내려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좀 나이 든 관계자가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 배부터는 대한민국 영토니 안심해도 된다'고 우리를 맞아주었다. 군함에서 다른 탈북자들과 우리 가족들은 따로 수용됐다."
- 한국에 들어온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는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4월 28일 새벽이었다. 아마도 인천항이었을 걸로 짐작은 하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그곳에서 창밖이 보이지 않는 승합차를 타고 어느 아파트에 도착했다. 거기엔 안기부 남·녀 직원이 2명 있었는데, 우리 가족들에게 A4용지 한 장씩을 나눠주더니 태어나서 한국에 들어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적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승용차 두 대에 우리 가족을 나눠 타게 하고 어디론가 향했는데, 창밖으로 인상적인 폭포가 하나 보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양화대교 인공폭포였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김포공항이었다. 그곳에서 일반 여행객들이 없는 곳으로 우리 가족들을 데려가더니 여권들을 하나씩 나눠줬다. 안기부 요원이 자신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고 하면서 출국 수속을 밟는 요령을 가르쳐 주고는 우리가족을 다시 홍콩행 비행기에 태웠다."
- 한국으로 들어온 바로 다음날 출국을 했다는 건데 이상하지 않았나.
"아마도 부모님들과는 미리 이야기가 된 것 같았지만, 나와 형제들은 왜 또 외국으로 나가라고 하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출국 과정에서 안기부 요원 두 명이 우리 가족과 동행했는데, 비행기를 타고나니 여권들을 다시 거둬갔다. 홍콩에 도착하고 나선 또다른 요원들이 합류해서 어느 호텔로 우리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내일이면 진짜 한국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거다.
내가 물어봤다. '왜 이렇게 왔다갔다 해야하는 거냐'고. 그랬더니 다른 탈북자들도 우리 가족들과 '같은 귀순 루트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 루트가 밝혀지면 안 된다'고 했다. 또 '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는 사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발설해선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리고 비밀을 지키겠다는 각서를 가져와서는 우리 식구 모두에게 지장을 찍게 했다. 그러면서 농담처럼 '당신들, 북한에 있을 때 우리(안기부) 얘기 들었잖아, 우린 무서운 사람들이야'라고 했는데, 당시 상황에선 웃고 넘길 수만은 없었다."
- 그날 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탄 것인가.
"아니다. 호텔에서 1박을 하면서 몇 가지 주의사항들을 교육시켰다. 이제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기자들이 많이 나와 있을 텐데, 기자들이 무엇을 물어보더라도 '지금 정신이 없어서 모르겠다'는 한마디만 하라고, '불필요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4월 30일 여씨 일가족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안기부가 사전에 마련해둔 각본 대로 언론은 김포공항에 도착한 일가족 귀순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의 입국경로가 공개되지 않고 '제3국을 통한 귀순' 정도로 소개되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다면 금룡씨의 진술을 신뢰할 수 있을까. 물론 당사자가 털어놓은 말이니만큼 진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확인과정이 필요했다. 기자는 금룡씨의 진술에 등장하는, 중국어선에서 만났다는 또 다른 탈북자 3인을 주목했다.
▲ 황광철 형제·김대호씨 기자회견 여만철씨 일가족과 함께 국내로 들어왔던 황광철·광호씨 형제와 김대호씨의 기자회견이 1994년 5월 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 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
실마리는 어렵지 않게 풀렸다. 바로 금룡씨가 이야기했던 광철씨 형제의 존재가 단서가 됐다. 여씨 일가족이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일주일 후인 5월 7일 안기부는 북한주민 세 사람의 귀순사실을 발표했다. 탄광 채탄공 황광철(20)·광호(18)씨 형제와 북한 원자력공업부 남천화학연합기업소 작업반장 김대호(35)씨가 제3국을 통해 각각 망명해왔다고 밝혔던 것이다.
이어 9일 열린 세 사람의 기자회견에서 황씨 형제는 귀순경로에 대해 "(중국) 모 항구에 남한 배가 자주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 달간 정찰 끝에 남한 배를 발견, 몰래 올라탔다"고 밝혔다.
황씨 형제와 진술 일치하는 '군함 입국'
▲ 94년 아버지 여만철씨와 함께 귀순한 여금룡씨가 21일 오전 서울 노원구 한 카페에서 당시 안기부의 귀순공작 의혹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 이희훈 |
황씨 형제는 금룡씨의 진술에서 이미 등장하고 있고, 금룡씨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30대 탈북자는 바로 김대호씨일 가능성이 높았다. 취재 결과 북한 영변 핵 단지내 우라늄 정련공장 기동예술 선전대 작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김씨가 망명 후 여러 권의 책을 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김씨는 지난 2001년 자신의 탈북 과정과 남한 정착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는 여씨 일가족과 관련된 결정적인 언급이 있다.
"해안도시(위해)에 도착한 것은 오후 다섯시가 지나서였다. 그 도시의 어느 아지트에서 한 가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은 40대 중년의 부부와 20대 초반의 딸, 10대의 두 아들이 있었다. 인솔자는 그 가족의 딸과 내가 당분간은 부부로 가장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어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며 자기소개를 간단히 했다. 여만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가족의 가장은 작은 키에 날카롭게 생긴 사람이었다. (중략)
배가 공해에 이르러 우리는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갑판으로 나왔는데, 큰 군함이 배 앞에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군함에 올랐다.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자유 세계로 인계되는 순간이었다. 군함 갑판 위에서 나이 지긋한 분이 나를 마중하며 말했다. '이젠 안심하세요, 여기는 대한민국 영토의 한 부분입니다.' 이어 널찍한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거기에는 우리 일행을 환영하기 위해 차려진 푸짐한 식탁이 기다리고 있었다." -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15~117페이지
금룡씨의 증언과 김씨의 책은 처음 만난 장소(금룡씨 - 어선 선창, 김씨 - 위해의 아지트)와 한국 입국 시점(금룡씨 - 4월 28일 새벽, 김씨 - 4월 27일 새벽 2시께) 등 일부 부분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중국 어선과 한국 군함을 통해 처음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금룡씨의 진술은 책의 내용과 일치한다. 외교적 마찰을 무릅쓰고 중국 어선을 이용해 탈북자들을 공해상으로 내보낸 후 군함까지 동원해 이들을 데리고 왔다는 사실은, 당시 안기부가 여씨 일가족 등의 입국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당시 안기부는 왜 이미 한국으로 데려왔던 여씨 일가족을 다시 홍콩으로 출국시켰다가 김포공항으로 재입국시키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을까. 여씨 가족에게 설명한 대로 입국루트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면 다른 탈북자들의 경우처럼 아예 언급 자체를 하지 않도록 하면 된다. 왜 굳이 김포공항에 기자들을 불러놓고 입국하는 과정을 공개했을까? 여기엔 다분히 의도성이 엿보인다.
이 대목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씨의 증언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안기부가 불법도청팀인 '미림팀'을 조직해 사회 유력인사들을 대상으로 불법 도·감청을 실시했다고 2005년 폭로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지난 2010년 8월 출판된 김씨의 책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에는 YS정권 시절 안기부 귀순공작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 있다.
그는 1993년 출범했던 문민정부가 전국 각지에서 연이어 터지기 시작한 사고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뉴스로 뉴스를 덮는" 방식의 공작을 시도했다고 증언했다. 김씨가 든 대표적 사례가 바로 조창호 소위의 귀순이다.
"1994년 10월 멀쩡하던 성수대교가 어느 날 아침 중간이 끊어져 내려앉으면서 수 십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부랴부랴 묘책을 찾아야 했다.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더 큰 뉴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탈북 국군포로였던 조창호 소위를 데려 오는 것이었다. 사실 안기부는 애초부터 조창호 소위가 탈북해서 중국을 통해 귀환을 시도하고 있던 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여 그저 팔짱만 끼고 지켜보고만 있었다.(중략)
당초 조 소위 일행은 조그만 통통배를 이용하여 서해를 건너려고 시도했다. 첫 번째 시도는 파도가 너무 높아 실패하고 말았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풍랑으로 인해 배가 실종되고 만다. 김덕 부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창호 소위를 살려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안기부는 수산청의 어업 지도선을 총 동원해서 서해를 이잡듯이 뒤졌다. 수색작업은 수산청을 담당하던 최모 서기관이 주도했다. 총력을 기울여 수색한 끝에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사흘 만에 조 소위를 구출해 낼 수 있었다. 정부는 즉각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거창한 환영식을 베풀었다. 이렇게 하여 국군포로 출신 탈북자 1호가 탄생한 것이었다." -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 234~235페이지
여만철씨 가족 귀순 순간, 한국에는 무슨 일이...
▲ 1994년 4월 27일자 <한겨레> 1면 여만철씨 일가족이 중국 어선을 타고 서해를 건너고 있던 1994년 4월 27일. <한겨레>는 대통령 아들 김현철씨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보도했다. ⓒ 한겨레 |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비판여론을 덮기 위한 목적으로 안기부가 조창호 소위의 귀순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실제 1994년 10월 24일 안기부는 "6·25전쟁에 포병 소위로 참전했다 포로가 돼 납북된 조창호(64)씨가 북한을 탈출해 군산 서남방 80마일 바다에서 표류하다 우리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구출됐다"고 발표했다. 이날은 성수대교가 무너져 많은 시민이 사망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렇다면 조창호 소위가 귀환하기 약 반 년 전 있었던 여만철씨 일가족 귀순 사건 전후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안기부가 여씨 일가족 귀순 소식으로 덮어야 할 뉴스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기자는 여씨 일가족이 비밀리에 한국에 입국한 1994년 4월 28일 전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뉴스 라이브러리를 검색했다.
4월 27일 <한겨레>는 1면에서 "김현철씨 쪽에 1억여 원 줬다" 제하의 기사에서 한약업사 정재중씨가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의 아들 김현철씨에게 무면허 한약업사들을 구제해달라는 조건으로 정치자금 1억2000만 원을 건네주었다고 폭로했다. 이어 28, 29, 30일 <한겨레>는 연일 대통령 아들 김현철씨의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1면에 보도했다. 같은 시간 여만철씨 일가족은 비밀리에 입국-홍콩 출국-김포 재입국의 이상한 경로를 밟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김현철씨는 '소통령'으로 불리며 아버지 YS와는 정치적 동지관계로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의 힘은 바로 안기부에서 나왔다. 안기부의 예산과 인사를 조정하는 기조실장 자리에 측근 김기섭씨를 앉히고 안기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현철씨의 국정개입 비화에 대해 한 안기부 간부의 증언에서 당시 안기부 내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현철씨는 김기섭 실장을 통해 안기부를 수족처럼 움직였습니다. 안기부장은 한마디로 허수아비였어요. 김 실장은 권영해 부장과 회의를 하면서도 '이건 소산(김현철씨의 아호)의 뜻'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습니다. 한약업사 사건 때는 관계부서장 회의에서 느닷없이 현철씨 얘길 꺼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아들이 돈을 받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구요. 김 실장은 그렇게 자기 뒤에 현철씨가 있다는 걸 떠들고 다녔습니다." - <경향> 1998년 6월 1일 자
안기부가 지난 1994년 과연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여만철씨 일가족의 망명 경로를 연출·조작했는지에 대해선 국정원이 입을 다물고 있는 한 정확한 의도를 확인하기 쉽지 않다. 다만 정보기관이 탈북자들의 급박한 상황을 이용해 국내 정치용으로 이들의 귀순을 이용했다는 비판만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지난 1994년 여씨 일가족보다 약 4개월 늦게 남한으로 입국한 김형덕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장은 한국 망명을 위해 북경, 청도, 베트남 등지의 한국 공관에 입국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김 소장은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한국 정보기관은 탈북자들 중에 정치적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들은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그래서 북한에서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일반 탈북자들은 한국공관에서 문전박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여만철씨 가족의 경우 일가족 5명이 한꺼번에 넘어왔다는 측면에서 활용가치가 있었을 것"이라면서 "국정원(안기부)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탈북자 입국을 이용했던 사례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오마이뉴스>는 24일 오전 국정원에 관련내용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25일 현재까지 답변이 오지 않았다.
국정원 보도 하루 뒤에야 답변
<오마이뉴스>는 기사가 나가기 전인 24일 오전부터 국가정보원 측에 사실확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국정원은 계속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 기사는 25일 오후 <오마이뉴스> 지면에 배치됐다. 기사가 나가고 하루가 지난 뒤에야 국정원은 연락을 해왔다. 국정원 측은 26일 오전 7시 50분께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관련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오마이뉴스>는 기사가 나가기 전인 24일 오전부터 국가정보원 측에 사실확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국정원은 계속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 기사는 25일 오후 <오마이뉴스> 지면에 배치됐다. 기사가 나가고 하루가 지난 뒤에야 국정원은 연락을 해왔다. 국정원 측은 26일 오전 7시 50분께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관련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출처 : 20년만에 밝혀진 '여만철 가족 귀순사건' 진실
'세상에 이럴수가 > 조작과 탄압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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