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후보, 파키스탄인 사형수 기억나세요?
1992년 외국인 살해사건, 검·경 부실 수사와 사형 구형·선고의 비극
홍준표 검사 “법정 최고형 구형한다”
[미디어오늘] 김도연 기자 | 2017년 05월 07일 일요일
‘스트롱 맨’을 자처하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를 대표하는 공약은 ‘사형제 집행’이다. 지난달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이 문제를 두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논쟁하던 그는 “흉악범이 너무 나댄다”며 사형 집행을 강조했다. 한국은 국제 앰네스티가 지정한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다. 지난 1997년 10월 30일을 마지막으로 20년간 사형이 집행된 적이 없다.
흥미로운 점은 사형제를 강조하는 홍 후보가 강력부 검사 시절 사형 집행의 위험성을 몸소 보여줬다는 것이다. 1992년 3월 발생한 ‘성남 파키스탄 노동자 살해사건’에서 그가 살인 혐의를 씌우고 사형을 구형한 파키스탄인들이 진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홍 후보는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시절이던 1992년 9월 22일 국내에서 폭력 조직을 결성하고 조직 간 보복 살인극을 벌인 혐의로 파키스탄인 아미르 자밀, 미안 무하마드 아자즈, 임란 사자드 등에 살인 및 사체유기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했다. ‘주비파’ 두목인 임란 사자드와 조직원 아미르, 무하마드가 상대파 ‘비키파’ 조직원들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 민간인에 대해 사법사상 최초로 구형된 사형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경향신문, 동아일보 등도 “외국인에 첫 死刑(사형) 구형”이라는 제목으로 큼직하게 기사를 냈다.
당시 홍준표 검사는 “피고인들은 2년 전 일본에서 범죄를 저질러 추방된 뒤 국내에 들어와 자국인 취업자들을 상대로 강도 행각을 일삼는가하면 경쟁하는 상대방 조직원을 잔인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살해했을 뿐 아니라 법정에서 시종 거짓 진술로 일관하는 등 개전의 정이 조금도 없어 법정 최고형을 구형한다”고 밝혔다.
일주일 뒤 서울형사지법 합의25부는 아미르와 무하마드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고 임란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언론들은 “외국인 범죄 첫 사형 선고”라는 제목으로 법원의 선고를 주목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은 최근 동남아 등지에서 입국한 근로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이들 사이에 범죄가 성행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최초의 외국인 조직 폭력배들 간의 사건”이라며 “이들은 불쌍한 자국민들을 상대로 갈취, 납치, 강도 행위 등을 자행하고 서로 이권 다툼을 벌이다 보복 살인극까지 저지른 만큼 우리 사회의 안녕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중형을 선고치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1993년 5월 대법원에서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임란은 15년형이 확정됐다. 검·경은 조직 폭력배 간 보복 살인으로 사건을 규정했지만 아미르와 무하마드가 1996년 故 김수환 추기경에게 자신들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면서 사건의 양상은 달라졌다. 당시 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김형태 변호사는 2012년 한겨레에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23살 아미르는 한국에 오기 전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고, 아버지는 자동차 매매업을 하는 중산층으로, 파키스탄에 있을 때는 ‘주비파 두목’이라는 임란은 전혀 알지도 못했다. 사건이 나기 불과 한 달 전 한국에 와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취업 브로커인 임란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건 당일도 일자리 때문에 임란을 만난 것일 뿐 그가 주비파 조직원이란 건 소설이었다. 31살 무하마드 역시 불과 한 달 전에 한국에 왔고 먼 친척뻘이 되는 아미르의 소개로 며칠 전 임란을 알게 된 것으로 무슨 조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비파니, 비키파니 하는 이름 자체가 경찰이 만들어 붙인 것이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살인은 임란 혼자서 한 짓이었다. 그가 아미르와 무하마드를 범행에 들러리로 세운 것이었다. 사건에 연루된 또 다른 파키스탄인 3명 증언 역시 아미르, 무하마드와 일치했다.
상대적으로 한국어에 능숙한 임란이 경찰 수사에서 아미르와 무하마드에게 모든 걸 떠넘겼고 경찰은 임란과 말이 통하자 주로 그의 진술에 의존했다. 경찰이 방망이에 천을 감고 물에 적셔 마구 때리고 전기 충격기를 성기에 갖다대는 등 13일 동안 모진 고문을 했다는 증언도 있었고 엉터리 통역으로 이들에 대한 수사는 진실과 멀어졌다. 검찰의 경우에는 살인의 핵심 증거인 두 자루의 칼을 법정에 제출하지 못하는 등 부실 수사 논란에 휩싸였다.
1996년 김수환 추기경이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각하께서 수사 당국이 이 사건을 재수사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란다”는 편지를 쓰고, 김영삼 정부 말 김 변호사가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면담하고 유엔과 앰네스티까지 관심을 보이는 등 구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이들은 1998년 8·15때 무기로 감형됐다가 이듬해 1999년 2월 3·1절 특사로 석방됐다. 주범인 임란도 덩달아 같은 혜택을 받고 아미르, 무하마드와 함께 풀려났다. 세 사람은 석방 당일 강제 추방됐다.
“흉악범들 인권 운운하는데 그 흉악범에 죽은 피해자의 인권은 생각 안 하냐. 피해자들은 어떻게 하고 흉악범은 멀쩡히 앉아서 국가에서 밥을 먹이는 것이 옳은가.”(4월 30일 홍 후보의 서울 강남구 코엑스 봉은사역 유세 연설 중)
마이크만 잡으면 사형 집행을 강조하는 홍 후보는 25년 전 파키스탄인 아미르, 무하마드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미르, 무하마드는 홍 검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대선 후보로 나선 것을 알고 있을까.
출처 홍준표 후보, 파키스탄인 사형수 기억나세요?
1992년 외국인 살해사건, 검·경 부실 수사와 사형 구형·선고의 비극
홍준표 검사 “법정 최고형 구형한다”
[미디어오늘] 김도연 기자 | 2017년 05월 07일 일요일
‘스트롱 맨’을 자처하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를 대표하는 공약은 ‘사형제 집행’이다. 지난달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이 문제를 두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논쟁하던 그는 “흉악범이 너무 나댄다”며 사형 집행을 강조했다. 한국은 국제 앰네스티가 지정한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다. 지난 1997년 10월 30일을 마지막으로 20년간 사형이 집행된 적이 없다.
흥미로운 점은 사형제를 강조하는 홍 후보가 강력부 검사 시절 사형 집행의 위험성을 몸소 보여줬다는 것이다. 1992년 3월 발생한 ‘성남 파키스탄 노동자 살해사건’에서 그가 살인 혐의를 씌우고 사형을 구형한 파키스탄인들이 진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홍 후보는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시절이던 1992년 9월 22일 국내에서 폭력 조직을 결성하고 조직 간 보복 살인극을 벌인 혐의로 파키스탄인 아미르 자밀, 미안 무하마드 아자즈, 임란 사자드 등에 살인 및 사체유기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했다. ‘주비파’ 두목인 임란 사자드와 조직원 아미르, 무하마드가 상대파 ‘비키파’ 조직원들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 동아일보 1992년 9월 23일자. 사진=네이버 라이브러리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 민간인에 대해 사법사상 최초로 구형된 사형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경향신문, 동아일보 등도 “외국인에 첫 死刑(사형) 구형”이라는 제목으로 큼직하게 기사를 냈다.
당시 홍준표 검사는 “피고인들은 2년 전 일본에서 범죄를 저질러 추방된 뒤 국내에 들어와 자국인 취업자들을 상대로 강도 행각을 일삼는가하면 경쟁하는 상대방 조직원을 잔인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살해했을 뿐 아니라 법정에서 시종 거짓 진술로 일관하는 등 개전의 정이 조금도 없어 법정 최고형을 구형한다”고 밝혔다.
일주일 뒤 서울형사지법 합의25부는 아미르와 무하마드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고 임란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언론들은 “외국인 범죄 첫 사형 선고”라는 제목으로 법원의 선고를 주목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은 최근 동남아 등지에서 입국한 근로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이들 사이에 범죄가 성행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최초의 외국인 조직 폭력배들 간의 사건”이라며 “이들은 불쌍한 자국민들을 상대로 갈취, 납치, 강도 행위 등을 자행하고 서로 이권 다툼을 벌이다 보복 살인극까지 저지른 만큼 우리 사회의 안녕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중형을 선고치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 동아일보 1992년 9월 30일자. 사진=네이버 라이브러리
1993년 5월 대법원에서 아미르와 무하마드는 사형, 임란은 15년형이 확정됐다. 검·경은 조직 폭력배 간 보복 살인으로 사건을 규정했지만 아미르와 무하마드가 1996년 故 김수환 추기경에게 자신들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면서 사건의 양상은 달라졌다. 당시 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김형태 변호사는 2012년 한겨레에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23살 아미르는 한국에 오기 전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고, 아버지는 자동차 매매업을 하는 중산층으로, 파키스탄에 있을 때는 ‘주비파 두목’이라는 임란은 전혀 알지도 못했다. 사건이 나기 불과 한 달 전 한국에 와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취업 브로커인 임란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건 당일도 일자리 때문에 임란을 만난 것일 뿐 그가 주비파 조직원이란 건 소설이었다. 31살 무하마드 역시 불과 한 달 전에 한국에 왔고 먼 친척뻘이 되는 아미르의 소개로 며칠 전 임란을 알게 된 것으로 무슨 조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비파니, 비키파니 하는 이름 자체가 경찰이 만들어 붙인 것이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살인은 임란 혼자서 한 짓이었다. 그가 아미르와 무하마드를 범행에 들러리로 세운 것이었다. 사건에 연루된 또 다른 파키스탄인 3명 증언 역시 아미르, 무하마드와 일치했다.
▲ 첫 외국인(파키스탄인) 사형 선고에 언론들은 주목했다. MBC 뉴스데스크 1992년 9월 29일자. 사진=MBC
상대적으로 한국어에 능숙한 임란이 경찰 수사에서 아미르와 무하마드에게 모든 걸 떠넘겼고 경찰은 임란과 말이 통하자 주로 그의 진술에 의존했다. 경찰이 방망이에 천을 감고 물에 적셔 마구 때리고 전기 충격기를 성기에 갖다대는 등 13일 동안 모진 고문을 했다는 증언도 있었고 엉터리 통역으로 이들에 대한 수사는 진실과 멀어졌다. 검찰의 경우에는 살인의 핵심 증거인 두 자루의 칼을 법정에 제출하지 못하는 등 부실 수사 논란에 휩싸였다.
1996년 김수환 추기경이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각하께서 수사 당국이 이 사건을 재수사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란다”는 편지를 쓰고, 김영삼 정부 말 김 변호사가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면담하고 유엔과 앰네스티까지 관심을 보이는 등 구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결국, 이들은 1998년 8·15때 무기로 감형됐다가 이듬해 1999년 2월 3·1절 특사로 석방됐다. 주범인 임란도 덩달아 같은 혜택을 받고 아미르, 무하마드와 함께 풀려났다. 세 사람은 석방 당일 강제 추방됐다.
“흉악범들 인권 운운하는데 그 흉악범에 죽은 피해자의 인권은 생각 안 하냐. 피해자들은 어떻게 하고 흉악범은 멀쩡히 앉아서 국가에서 밥을 먹이는 것이 옳은가.”(4월 30일 홍 후보의 서울 강남구 코엑스 봉은사역 유세 연설 중)
마이크만 잡으면 사형 집행을 강조하는 홍 후보는 25년 전 파키스탄인 아미르, 무하마드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미르, 무하마드는 홍 검사가 대한민국 대통령 대선 후보로 나선 것을 알고 있을까.
출처 홍준표 후보, 파키스탄인 사형수 기억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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