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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파쇄’ 전직법관…법원에 ‘구명 이메일’까지 돌려

영장 기각 틈타 ‘증거 파쇄’ 전직법관…법원에 ‘구명 이메일’까지 돌려
검찰, 증거인멸에 현직법관 연루됐을 경우
“지위고하 막론 엄정한 책임 묻겠다” 격앙

[한겨레] 현소은 기자 | 등록 : 2018-09-11 12:08 | 수정 : 2018-09-11 12:40


▲ 11일 오전 검찰이 압수수색을 진행한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맨왼쪽)이 검찰 관계자와 대화하고 있다. 유 전 연구관은 대법원 재판 기밀자료를 반출한 뒤 압수수색영장이 기각된 사이 자료를 파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백소아 기자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 기각을 틈타 ‘증거’ 수만 건을 파쇄한 전직 고위법관이 영장 심사가 진행 중이던 때 검찰 수사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문건을 작성해 현직 법관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파장이 커지고 있다. 해당 문건에는 검찰이 적용한 주요 혐의에 대한 ‘유·무죄’ 판단, 압수수색 과정의 문제점, 검사 면담 내용 등 수사 진행 상황, 형사소송법 규정 등이 담겼다. 검찰은 증거인멸과 수사 방해에 현직 법관들이 연루된 정황이 드러날 경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유해용 변호사(전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는 지난 주말 사이 ‘사법 농단’ 수사대상이 된 것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메일을 지인들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차관급(고법 부장)인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으로 재직한 뒤 지난 2월 퇴직하며 재판연구관 보고서 등 재판자료 수만 건을 뭉치째 들고 나간 의혹을 받는다.

유 변호사는 세 통의 이메일에서 자신이 수사대상이 된 경위, 지난 2일 검찰 면담 내용, 지난 5일 1차 압수수색 과정을 상세히 밝히며 ‘표적수사’라는 취지의 주장을 펼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유출) 자료는 공무상 비밀이나 공공기록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법원 근무시 작성한 자료를 추억 삼아 갖고 나온 것”이라는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메일은 현직 판사들에게도 전달됐다고 한다.

▲ 11일 오전 검찰이 서울 서초동 유해용 변호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있다.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었던 유 변호사는 지난 2월 퇴직하며 대법원 재판자료 수만 건을 무단 유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유 변호사는 법원이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한 틈을 타 유출 자료를 모두 파쇄했다. 백소아 기자

특히 유 변호사는 이메일에서 문건 유출 행위에 대해 법률적 판단과 법원 내부 결재 과정 등을 자세히 거론하며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료 상당 부분은 개인 의견을 담은 자료라서 ‘공무상 비밀’이나 ‘공공기록물’에 해당하지 않고 △재판연구관으로부터 넘겨받은 보고서도 초안 형태라 정식 등록된 자료가 아니며 △판결문 초고 의견서도 대부분 판결이 선고된 사건에 관한 것이라는 등 주장이다. 유 변호사는 이어 “법원에서 습관처럼 작성하거나 저장한 자료 가운데 일부를 추억 삼아 갖고 나온 것에 불과하다”고도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박근혜 측근 박채윤씨의 대법원 재판기록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통해 청와대에 전달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메모의 경우 공무상 비밀이 될 수 없고, 연구관 보고서라도 사법행정 목적에 따라 (행정처에) 제공할 수 있도록 돼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일제 강제징용 민사소송,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선거법 위반 재판, 통합진보당 행정소송 등에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재판 거래 의혹은 근거 없다”, “부당한 의도가 없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 변호사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이메일은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가 지난 7일 재청구된 유 변호사 압수수색 영장에 대한 판단을 사흘 간 미루는 사이 판사들 사이에 퍼진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지난 5일 박채윤씨 소송 관련 의혹으로 유 변호사 사무실을 압수수색(1차)하던 중 재판연구관 보고서 등 재판기록이 무더기 유출된 정황을 포착했다. 이에 별도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2차)했지만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6일 이를 기각됐다. 검찰은 지난 7일 밤 압수수색 영장을 재청구했고, 사흘 뒤인 지난 10일 박범석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문건 유출은) 대법원에 부적절한 행위이지만 죄는 안된다”며 대부분의 영장을 기각했다. 공무상 비밀누설,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절도 등에 대한 형사책임은 부인한 채 “부적절한 행위”로 정리한 것이다. 유 변호사가 이메일에서 ‘죄가 안 된다’고 주장한 것과 비슷한 논리다. 박 부장판사는 2014년 유 변호사가 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하던 시기 함께 재판연구관으로 일했다.

앞서 유 변호사는 지난 5일 압수수색 당시 ‘유출 문건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검찰에 써냈지만, 이튿날 영장이 기각된 사실이 알려진 직후 유출 문건을 모두 파쇄하고 컴퓨터 하드디스크도 버린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증거 인멸 행위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책임을 묻겠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출처  영장 기각 틈타 ‘증거 파쇄’ 전직법관…법원에 ‘구명 이메일’까지 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