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통치안 왜곡의 출발은 ‘날조 전문’ 미국 기자
⑫ 신탁통치 대립
미국 “10년간 조선 신탁통치를”
소련 “즉시 독립시켜야” 주장했던
미·영·소 모스크바삼상회의 내용
미국 ‘UP통신’ 기자 거꾸로 쓰고
미군 ‘태평양 성조기’ 도쿄서 보도
같은 날 국내 신문에도 일제히 실려
막강한 배후 없이는 불가능한 일
[한겨레] 정용욱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한국 현대사 전공) | 등록 : 2019-06-08 09:14 | 수정 : 2019-06-08 09:59
위당 정인보 선생이 1947년 8월 24일 ‘미국에 보내는 진정서’(Appeal to the United States)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남한을 방문하는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보냈다. 타자지 4장 분량의 영문 편지이고, 한국어 원본을 찾지 못했지만 한글로 번역하면 200자 원고지 43장 분량의 장문이다. 편지를 영역한 미군정 관리는 정인보를 “중국 고전, 조선 역사 및 문화에 관한 권위자로 온 나라에 알려진 교수”라고 소개했다. 그의 ‘진정서’는 5단락으로 되어 있고, 번역된 영문으로도 유려한 문체에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위당은 편지 서두에서 한국인은 민족적 자존심이 유난히 높은 민족이고, 그것을 미국 시민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고 밝힌다. 그는 이를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 이전 상황과 이후 상황을 비교해서 설명했다. 점령 이전에는 “가장 외진 마을에서도 도둑과 강도가 없었고, 어떤 거리에서도 싸움이 관찰되지 않았다. 이는 모두 대중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민족적 자존심 때문”이다. 그러나 “소생된 나라의 앞날이 흐릿해지고,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이 현실로 되자 그때까지 그들의 활기를 북돋던 자존심은 의지할 데가 없어졌고, 그들의 억압된 열정은 터진 둑을 따라 쏟아지는 급류와 같이 통제를 상실”했다. 또 미군의 점령정책과 그 결과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우리 역사에서 모든 몰락하는 왕조는 혼란하고 왜곡된 모습을 보였으나 현재 혼란은 기록상 유례없는 일”이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미군정의 우유부단하고 되는대로의 정책 탓”으로 본다고 설명한다.
둘째 문단은 분할점령의 장기화와 미·소 협조에 의한 한국 문제 해결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한국인들의 실망감이 커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넷째 문단은 “이 문제는 독립 약속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와 같이 4 강대국 회담에 회부되어야 하고, 조선인 자신의 주도권 아래 정부를 설립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정부를 유엔(UN)이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둘째 문단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근본적 불신을 드러낸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솔직히 말해서 신탁통치를 포함하는 어떠한 해결책도 국제적으로 보장된 조선 독립의 모조품이거나 매춘행위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해방 이후 미-소 관계나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전개된 정세 변화에 대해 현실적 이해가 부족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민족적 자존심이 신탁통치를 허용하지 않으니 하루빨리 한국인 손으로 정부를 수립하게 하라는 것이다. 위당은 그것을 한국인이 5천년 역사를 통해 얻은 민족적 긍지의 발휘로 파악했다.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문장가이자 저명한 민족주의자가 해방 이후 2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간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한 나름의 소회와 점령군 당국을 향해 제시한 헌책인 만큼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글이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한국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인식이다. 그 부분을 직접 살펴보자.
국학자 정인보, 웨더마이어에게 편지
“미군정 우유부단 정책 탓 혼란 가중
조선인 주도로 정부 수립을” 요구
위당은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가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수용되었고, 일제 강점기만 해도 대부분의 민중들이 공산주의자들을 폭넓게 지지했다고 말한다. 저명한 기독교 민족주의자이자 신간회 초대 회장인 월남 이상재 선생이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의 근원이며,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의 본류”라고까지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위당의 이러한 언급은 그만의 독특한 시각이라기보다 당시 한국 사회가 공유한 상식이다. 또 위당은 편지에서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신탁통치를 지지한 뒤부터 민중들과 소원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45년 연말 미국, 영국, 소련 삼국 외상이 참가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삼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체결한 ‘조선에 관한 결정’이 국내에 전파되어 결정 지지와 반탁으로 정국을 분열시키기 이전의 시점만 해도 민족통합과 제 당파의 정치적 통합을 통해서 하루빨리 나라의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에 그 어떤 정치세력도 토를 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삼상회의 결정의 조선과 관련된 내용이 국내에 보도되자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1945년 연말과 1946년 벽두에 남한에 몰아닥친 반탁운동의 열풍과 신탁통치 논쟁은 남한 정치에 좌우 대립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 정치세력들이 삼상회의 결정 지지와 반탁으로 결집하기 시작했고, 1946년 2월 중순 우익의 대표 기구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과 좌익의 대표 기구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수립으로 좌우 대립 구도가 본격화되었다.
탁치(신탁통치) 논쟁이 본격화한 1945년 연말과 1946년 연초의 시점은 해방 직후 정치사를 가르는 하나의 획기인 만큼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고, 가장 먼저 해명해야 할 것은 삼상회의 결정의 국내 전달과 확산 과정이다. 삼상회의 결정은 1945년 12월 27일 ‘워싱턴 25일발 <합동통신> 지급보(至急報)’로 국내에 최초로 유입되었다. 제목만 조금씩 차이가 났지 <동아일보>, <조선일보>, <민중일보>, <중앙신문>, <신조선보> 등 대부분의 신문들이 아래 기사를 1면 상단 헤드라인 또는 중단에 그대로 보도했다.
이 기사는 삼상회의 당시 미·소 양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왜곡보도였다. 삼상회의에서 미국은 신탁통치, 그것도 10년간의 신탁통치를 제안했고, 역으로 소련은 즉시 독립을 제안했으나 삼국 외상들은 협상을 거쳐 한국문제 처리 방안으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과 5년간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잘 알다시피 미국, 영국, 중국 세 나라 대표가 카이로선언(1943년)에서 조선의 독립을 결의했지만,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 형태를 결정한다는 내용은 선언에 들어 있지 않다.
이 기사는 마치 남한에서 일어날 격렬한 반탁운동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이 탁치 제안자를 미국이 아니라 소련으로 지목하고, 38선 분할이 지속되는 것도 소련 때문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이 기사는 반탁운동을 격화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며칠간 삼상회의와 그 결정 내용에 대한 국내 신문의 보도 태도와 방향을 결정했다.
당시 미 군정청 공보부는 한국인의 여론 동정을 관찰해서 주간 단위로 ‘정치동향’(Political Trend)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특히 삼상회의 결정의 국내 전달 이후 반탁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연말연시 며칠간은 한국인들의 여론 동정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사후에 ‘신탁통치’라는 특별보고서도 작성했다. ‘정치동향’ 14호(1945. 12. 29)는 “합동통신사가 배포한 기사가 강력한 반소 감정을 일으켰다”면서 왜곡보도의 출처로 합동통신사를 지목했다. 또 ‘신탁통치’ 특별보고서는 그 기사가 워싱턴발이 아니라 미 육군이 태평양지역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위해 도쿄에서 발행하던 12월 27일자 <성조기> 태평양판(Pacific Stars and Stripes)이었다고 적었다.
워싱턴발로 위장한 국내 신문들 기사는 <태평양 성조기>에 실린 ‘외신 종합’ 기사 중 한국 관련 기사를 그대로 전재 번역한 것인데, 이 신문은 <유피(UP)통신>의 랄프 헤인젠(Ralph Heinzen)을 작성자로 인용했다. 이 기자는 2차대전 당시 유럽에서 통신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고, 동료들로부터 ‘악명 높은 날조 전문가’, ‘상상력만으로 벽면 가득히 기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던 이른바 ‘기레기’였고, 아시아 전문가가 전혀 아니었다. 필자가 아는 한 랄프 헤인젠의 기사는 워싱턴 D.C.에 있는 유피통신사 후신인 <유피아이(UPI)통신> 본사 문서고에 존재하지 않는다.
미군정 관리들은 국내 신문의 왜곡보도를 추적하면서 <합동통신>을 출처로 지목했다. 당시 합동통신은 우익 성향 통신사로 분류되었으며, 합동통신 주간 김동성은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공보처장을 지냈지만, 그 출처는 합동통신이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 미군정 보고서들은 이 기사가 <태평양 성조기> 12월 27일자에 실렸고 국내 신문들이 12월 28일 이 기사를 보도했다고 적었으나 국내 신문들도 모두 12월 27일 같은 기사를 보도했다. 그렇다면 왜곡보도의 주체는 도쿄와 서울에서 미 육군 신문과 국내 신문에 같은 기사를 동시에 배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이고, 일개 국내 통신사(합동통신)가 그런 능력을 가졌을 리는 만무했다.
이 기사의 보도 이후 어떤 신문은 반탁운동을 부채질했고, 어떤 신문은 한국문제가 국제화하는 것을 우려하며 국내 통일에 전력을 다할 것을 호소한다.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지형을 식민 유제와 잔재 청산이라는 과제로부터 좌우 대립 구도로 재편한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한국 사회에 남긴 가장 커다란 부(負)의 유산이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파쟁은 미·소 간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기준이 밖으로부터 부과되면서 빚어낸 마찰음이자 한국 사회 내부로부터의 파열음이었고, 그 과정에서 작위적 공작이 난무했다.
다시 위당으로 돌아가면 해방 직후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다양한 정치·사회 활동에 연루되었으나, 해방 정국에서 그가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혁명가 유가족들의 원호와 순국선열 추념사업이었다. 가족의 회고에 따르면 1946년 3월 1일 발표한 ‘순국선열 추도문’은 광복 이후 그가 첫 온정을 다 쏟아 지은 명문 중 하나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한국 사회가 약산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추진을 둘러싸고 벌이는 논란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지만 아무래도 송구해서 차마 여쭤보지는 못할 듯싶다.
출처 신탁통치안 왜곡의 출발은 ‘날조 전문’ 미국 기자
⑫ 신탁통치 대립
미국 “10년간 조선 신탁통치를”
소련 “즉시 독립시켜야” 주장했던
미·영·소 모스크바삼상회의 내용
미국 ‘UP통신’ 기자 거꾸로 쓰고
미군 ‘태평양 성조기’ 도쿄서 보도
같은 날 국내 신문에도 일제히 실려
막강한 배후 없이는 불가능한 일
[한겨레] 정용욱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한국 현대사 전공) | 등록 : 2019-06-08 09:14 | 수정 : 2019-06-08 09:59
▲ 1947년 6월 23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시위는 김구에 의해 조직됐으며, 시위대는 소련 공사관으로 행진했다가 다시 이곳에서 연좌농성을 진행했다. 국사편찬위 소장
▲ 1947년 6월 23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반탁시위. 국사편찬위 소장
위당 정인보 선생이 1947년 8월 24일 ‘미국에 보내는 진정서’(Appeal to the United States)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 남한을 방문하는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보냈다. 타자지 4장 분량의 영문 편지이고, 한국어 원본을 찾지 못했지만 한글로 번역하면 200자 원고지 43장 분량의 장문이다. 편지를 영역한 미군정 관리는 정인보를 “중국 고전, 조선 역사 및 문화에 관한 권위자로 온 나라에 알려진 교수”라고 소개했다. 그의 ‘진정서’는 5단락으로 되어 있고, 번역된 영문으로도 유려한 문체에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위당은 편지 서두에서 한국인은 민족적 자존심이 유난히 높은 민족이고, 그것을 미국 시민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고 밝힌다. 그는 이를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 이전 상황과 이후 상황을 비교해서 설명했다. 점령 이전에는 “가장 외진 마을에서도 도둑과 강도가 없었고, 어떤 거리에서도 싸움이 관찰되지 않았다. 이는 모두 대중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민족적 자존심 때문”이다. 그러나 “소생된 나라의 앞날이 흐릿해지고,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이 현실로 되자 그때까지 그들의 활기를 북돋던 자존심은 의지할 데가 없어졌고, 그들의 억압된 열정은 터진 둑을 따라 쏟아지는 급류와 같이 통제를 상실”했다. 또 미군의 점령정책과 그 결과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우리 역사에서 모든 몰락하는 왕조는 혼란하고 왜곡된 모습을 보였으나 현재 혼란은 기록상 유례없는 일”이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미군정의 우유부단하고 되는대로의 정책 탓”으로 본다고 설명한다.
둘째 문단은 분할점령의 장기화와 미·소 협조에 의한 한국 문제 해결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한국인들의 실망감이 커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넷째 문단은 “이 문제는 독립 약속이 처음 제기되었을 때와 같이 4 강대국 회담에 회부되어야 하고, 조선인 자신의 주도권 아래 정부를 설립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정부를 유엔(UN)이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둘째 문단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근본적 불신을 드러낸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솔직히 말해서 신탁통치를 포함하는 어떠한 해결책도 국제적으로 보장된 조선 독립의 모조품이거나 매춘행위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조선을 연합국이 신탁통치하기로 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내용이 담긴 벽보를 서울시민들이 보고 있다. 1945년 12월 29일. 국사편찬위 소장
▲ 신탁통치에 대해 미국은 찬성하고 소련은 반대했던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내용이 거꾸로 알려진 뒤에 우익세력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으로 총결집했다. 사진은 1945년 12월 31일 경성운동장(현재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에 있었던 동대문운동장의 옛 이름)에 집결한 사람들이 반탁운동에 대한 연설을 기다리고 있다. 국사편찬위 소장
“찬탁 뒤 공산주의자들 민중과 멀어져”
그의 주장은 해방 이후 미-소 관계나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전개된 정세 변화에 대해 현실적 이해가 부족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민족적 자존심이 신탁통치를 허용하지 않으니 하루빨리 한국인 손으로 정부를 수립하게 하라는 것이다. 위당은 그것을 한국인이 5천년 역사를 통해 얻은 민족적 긍지의 발휘로 파악했다.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문장가이자 저명한 민족주의자가 해방 이후 2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간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한 나름의 소회와 점령군 당국을 향해 제시한 헌책인 만큼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글이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한국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인식이다. 그 부분을 직접 살펴보자.
“조선인들은 다른 민족과 같이 의견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라는 측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단결합니다. …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들도 일제 치하에서 애국적 민족주의자들과 힘을 합했고 대부분의 한국 인민들은 그들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때 완전히 무력했고 우리의 애국적 활동을 좀처럼 현실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중국은 매우 좋은 친구였으나 힘이 없었고, 미국은 힘이 있었으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러시아만이 우리와 인접했고, 우리와 함께 일본에 대한 증오를 공유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조선인들이 러시아적 방식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가 어떻게 우리 토양에 뿌리내렸는지를 설명합니다. 소련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에서 공산주의는 민족주의라는 비료로 풍성해졌습니다. 또 그 추종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민족적 자존심에 의해서 움직였습니다. 공산주의가 일정 부분 인민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북쪽으로부터의 도움만큼이나 대중들의 심중에 남아 있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가졌던 오래된 애국주의적 이미지 때문입니다.”
▲ 저명한 국학자였던 위당 정인보가 1947년 8월 미국 대통령 특사로 방한했던 웨더마이어 장군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영역된 편지에서 위당은 조선인 주도의 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정용욱 교수 제공
국학자 정인보, 웨더마이어에게 편지
“미군정 우유부단 정책 탓 혼란 가중
조선인 주도로 정부 수립을” 요구
위당은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가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수용되었고, 일제 강점기만 해도 대부분의 민중들이 공산주의자들을 폭넓게 지지했다고 말한다. 저명한 기독교 민족주의자이자 신간회 초대 회장인 월남 이상재 선생이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의 근원이며,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의 본류”라고까지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위당의 이러한 언급은 그만의 독특한 시각이라기보다 당시 한국 사회가 공유한 상식이다. 또 위당은 편지에서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신탁통치를 지지한 뒤부터 민중들과 소원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45년 연말 미국, 영국, 소련 삼국 외상이 참가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삼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체결한 ‘조선에 관한 결정’이 국내에 전파되어 결정 지지와 반탁으로 정국을 분열시키기 이전의 시점만 해도 민족통합과 제 당파의 정치적 통합을 통해서 하루빨리 나라의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에 그 어떤 정치세력도 토를 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삼상회의 결정의 조선과 관련된 내용이 국내에 보도되자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1945년 연말과 1946년 벽두에 남한에 몰아닥친 반탁운동의 열풍과 신탁통치 논쟁은 남한 정치에 좌우 대립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 정치세력들이 삼상회의 결정 지지와 반탁으로 결집하기 시작했고, 1946년 2월 중순 우익의 대표 기구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과 좌익의 대표 기구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수립으로 좌우 대립 구도가 본격화되었다.
▲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첫 회의에 참석한 미국과 소련 대표단이 덕수궁 석조전 계단에 서 있다. 앞줄 왼쪽은 미국 대표 존 하지 사령관, 오른쪽은 소련 대표인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스티코프) 중장. 국사편찬위 소장
삼상회의 결정, 국내 확산 과정 보니
탁치(신탁통치) 논쟁이 본격화한 1945년 연말과 1946년 연초의 시점은 해방 직후 정치사를 가르는 하나의 획기인 만큼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고, 가장 먼저 해명해야 할 것은 삼상회의 결정의 국내 전달과 확산 과정이다. 삼상회의 결정은 1945년 12월 27일 ‘워싱턴 25일발 <합동통신> 지급보(至急報)’로 국내에 최초로 유입되었다. 제목만 조금씩 차이가 났지 <동아일보>, <조선일보>, <민중일보>, <중앙신문>, <신조선보> 등 대부분의 신문들이 아래 기사를 1면 상단 헤드라인 또는 중단에 그대로 보도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다. 즉, 번스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至急報)”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가고 있다. 즉, 번스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至急報)”
이 기사는 삼상회의 당시 미·소 양측의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왜곡보도였다. 삼상회의에서 미국은 신탁통치, 그것도 10년간의 신탁통치를 제안했고, 역으로 소련은 즉시 독립을 제안했으나 삼국 외상들은 협상을 거쳐 한국문제 처리 방안으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과 5년간 신탁통치를 결정했다. 잘 알다시피 미국, 영국, 중국 세 나라 대표가 카이로선언(1943년)에서 조선의 독립을 결의했지만,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 형태를 결정한다는 내용은 선언에 들어 있지 않다.
이 기사는 마치 남한에서 일어날 격렬한 반탁운동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이 탁치 제안자를 미국이 아니라 소련으로 지목하고, 38선 분할이 지속되는 것도 소련 때문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이 기사는 반탁운동을 격화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며칠간 삼상회의와 그 결정 내용에 대한 국내 신문의 보도 태도와 방향을 결정했다.
당시 미 군정청 공보부는 한국인의 여론 동정을 관찰해서 주간 단위로 ‘정치동향’(Political Trend)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특히 삼상회의 결정의 국내 전달 이후 반탁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연말연시 며칠간은 한국인들의 여론 동정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사후에 ‘신탁통치’라는 특별보고서도 작성했다. ‘정치동향’ 14호(1945. 12. 29)는 “합동통신사가 배포한 기사가 강력한 반소 감정을 일으켰다”면서 왜곡보도의 출처로 합동통신사를 지목했다. 또 ‘신탁통치’ 특별보고서는 그 기사가 워싱턴발이 아니라 미 육군이 태평양지역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위해 도쿄에서 발행하던 12월 27일자 <성조기> 태평양판(Pacific Stars and Stripes)이었다고 적었다.
▲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주장을 최초로 왜곡보도한 <태평양 성조기>의 1945년 12월 27일자 1면. 미군이 운영하는 이 신문의 해당 기사는 당시 ‘날조 전문가’로 유명했던 랄프 헤인젠 기자가 썼다. 정용욱 교수 제공
▲ 미군의 <태평양 성조기>와 같은 날 모스크바 삼상회의 내용을 전한 당시 <신조선보>의 지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도 같은 내용으로 보도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워싱턴발로 위장한 국내 신문들 기사는 <태평양 성조기>에 실린 ‘외신 종합’ 기사 중 한국 관련 기사를 그대로 전재 번역한 것인데, 이 신문은 <유피(UP)통신>의 랄프 헤인젠(Ralph Heinzen)을 작성자로 인용했다. 이 기자는 2차대전 당시 유럽에서 통신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고, 동료들로부터 ‘악명 높은 날조 전문가’, ‘상상력만으로 벽면 가득히 기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던 이른바 ‘기레기’였고, 아시아 전문가가 전혀 아니었다. 필자가 아는 한 랄프 헤인젠의 기사는 워싱턴 D.C.에 있는 유피통신사 후신인 <유피아이(UPI)통신> 본사 문서고에 존재하지 않는다.
미군정 관리들은 국내 신문의 왜곡보도를 추적하면서 <합동통신>을 출처로 지목했다. 당시 합동통신은 우익 성향 통신사로 분류되었으며, 합동통신 주간 김동성은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공보처장을 지냈지만, 그 출처는 합동통신이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 미군정 보고서들은 이 기사가 <태평양 성조기> 12월 27일자에 실렸고 국내 신문들이 12월 28일 이 기사를 보도했다고 적었으나 국내 신문들도 모두 12월 27일 같은 기사를 보도했다. 그렇다면 왜곡보도의 주체는 도쿄와 서울에서 미 육군 신문과 국내 신문에 같은 기사를 동시에 배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이고, 일개 국내 통신사(합동통신)가 그런 능력을 가졌을 리는 만무했다.
‘일제 청산’ 과제 좌우대립으로 재편
이 기사의 보도 이후 어떤 신문은 반탁운동을 부채질했고, 어떤 신문은 한국문제가 국제화하는 것을 우려하며 국내 통일에 전력을 다할 것을 호소한다. 해방 이후 한국의 정치지형을 식민 유제와 잔재 청산이라는 과제로부터 좌우 대립 구도로 재편한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한국 사회에 남긴 가장 커다란 부(負)의 유산이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파쟁은 미·소 간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기준이 밖으로부터 부과되면서 빚어낸 마찰음이자 한국 사회 내부로부터의 파열음이었고, 그 과정에서 작위적 공작이 난무했다.
다시 위당으로 돌아가면 해방 직후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다양한 정치·사회 활동에 연루되었으나, 해방 정국에서 그가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혁명가 유가족들의 원호와 순국선열 추념사업이었다. 가족의 회고에 따르면 1946년 3월 1일 발표한 ‘순국선열 추도문’은 광복 이후 그가 첫 온정을 다 쏟아 지은 명문 중 하나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한국 사회가 약산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추진을 둘러싸고 벌이는 논란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지만 아무래도 송구해서 차마 여쭤보지는 못할 듯싶다.
출처 신탁통치안 왜곡의 출발은 ‘날조 전문’ 미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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