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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반쪽짜리’ 사과·언론의 ‘반쪽짜리’ 보도

삼성의 ‘반쪽짜리’ 사과·언론의 ‘반쪽짜리’ 보도
[신문읽기] 알맹이 없는 사과 ‘알맹이 있게 포장하기’ 바쁜 언론들
[고발뉴스닷컴] 민동기 미디어전문기자 | 승인 : 2020.05.07 09:55:57 | 수정 : 2020.05.07 11:11:25


이재용(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경영권 승계와 노조 문제 등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어제(6일) 저녁 방송 메인뉴스를 비롯해 오늘(7일) 발행된 전국단위종합일간지 주요 기사가 ‘이재용 사과’로 도배가 됐습니다.

많은 언론이 보도했지만 그래도 이재용 사과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재용은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그동안 저와 삼성은 승계 문제와 관련해 많은 질책을 받아왔다”며 “앞으로 더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법을 어기는 일을 결코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재용은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 이재용(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오후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에서 경영권 승계 및 노동조합 문제 등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마친 후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경영권 승계 하지 않겠다”… 핵심은 경영권 승계 여부가 아니다

경영권 승계 외에 이재용이 강조한 것은 ‘무노조 경영 철폐’였습니다. 그는 “이제 더이상 삼성에서는 ‘무노조 경영’이란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며 “노사관계 법령을 철저히 준수하고, 노동3권을 확실히 보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문제는 ‘선언’만 있을 뿐 ‘구체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한겨레 등 일부 언론이 지적했지만 사과에 진정성을 보이려면 최소한의 조처가 있어야 합니다.

△잘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구체적으로’ 인정해야 하고 △재발 방지와 관련해서도 ‘구체적으로’ 대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또한 피해자 구제와 관련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 같은 방안들을 내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재용 사과문에는 ‘이런 구체성’이 없습니다. 좀 거칠게 평가하면 “법을 어기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추상적인 선언만 있을 뿐입니다.

기성 언론 상당수가 호평한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이재용은 “제 아이들에게는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지만 이 문제는 최소 10년 이후에나 발생할 ‘미래 일’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실제로 이 말을 지킬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경영권 승계를 하지 않는다면 삼성이 앞으로 전문경영인 체제로 간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전문경영인 체제를 언제 어떻게 도입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밝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과 선언’만 있을 뿐 ‘구체적 계획’은 없었습니다.

사실 이런 점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이재용의 사과 자체가 삼성이 자발적으로 한 사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재용이 사과를 하기까지 ‘일정’을 되짚어 가보면, 출발은 지난해 8월입니다. 이재용의 대법원 국정농단 상고심에서 파기환송된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가 준법감시위 설치를 할 때 양형에 반영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삼성 측은 지난 2월 외부 명망가로 구성된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었고, 이후 준법감시위원회는 이재용에게 △경영권 승계 의혹 대국민 사과 △무노조 경영 방침 철회 △시민사회와 신뢰 회복 등의 내용을 주문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제(6일) 사과로 이어진 겁니다.


‘측근들 반대했지만 이재용이 강행’ 강조한 기성 언론들

사실 이재용의 사과문 관련 보도를 할 땐 ‘이런 배경과 맥락’을 최대한 전제한 상태에서 보도가 이뤄져야 합니다. 배경과 맥락을 빼고 ‘사과문 자체’에 집중하게 되면 ‘과대 평가’나 ‘이재용의 결단’만 주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한겨레 정도를 제외하곤 기성 언론 상당수가 이재용의 결단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갔다는 겁니다.

오늘 한겨레 1면 제목은 <불법승계 책임 빠진 ‘이재용의 반성문’>입니다. 한겨레는 관련 기사에서 <준법감시위 권고에 등떠밀린 ‘이재용 사과’> 그리고 사설 <‘다짐’ 뒷받침할 ‘쇄신책’ 안 보이는 이재용 사과> 등에서 이재용의 사과가 반쪽짜리 사과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경향신문은 한겨레 만큼의 비판은 아니지만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 비판 목소리를 담았고, 다른 신문에 비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했습니다.

하지만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제외한 다른 신문들은 “자녀에게 경영권 물려주지 않겠다”는 이재용의 발언과 결단을 주목했습니다. 대략적으로 제목만 한번 볼까요.

<주변 반대에도 진정성 강조 위해 직접 기자회견 자청> (국민일보 2면)
<‘진정한 반성’ 인식땐 집행유예 판결 가능> (국민일보 3면)
<이재용 “자녀들에 경영권 안물려줄것”> (동아일보 1면)
<이재용, 내부 만류에도 ‘자녀승계 불가’ 결단> (동아일보 3면)
<이재용 “경영권 안 물려줄 것… 노동 3권 보장”> (서울신문 1면)
<이재용 “자녀에게 경영권 물려주지 않겠다” 파격 선언> (세계일보 1면)
<이재용, 10분간 세 차례 고개 숙여… 진정성 담으려 직접 회견 자청> (세계일보 2면)
<이재용 “제 아이들에게 경영권 물려주지 않겠다”> (조선일보 1면)
<이재용, 참모들 반대에도 준법감시위 4대 요구 다 받아들였다> (조선일보 3면)
<“삼성 경영, 자녀 안 물려준다”> (중앙일보 1면)
<고개 숙인 이재용 “삼성, 4세 경영은 없다” 전격 선언> (한국일보 1면)
<사내 논란 뚫고 사과 회견… 세 번 고개 숙인 이재용> (한국일보 3면)


삼성과 특수관계에 있는 중앙일보가 오히려 다른 신문과 비교했을 때 차분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재용 사과문’ 사과문 관련 보도는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지만 제가 오늘(7일) 발행된 전국단위종합일간지에서 가장 ‘문제가 많다’고 판단한 건 조선일보 사설입니다.

오늘(7일)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이재용 부회장의 사과>인데, 대기업 총수 관련 언론 보도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다 드러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반노동’, ‘피해자 프레임’, ‘경제활성화’ 강조가 모두 포함돼 있기 때문입니다. 잠깐 한번 볼까요.


이재용은 피해자다? 난데 없이 ‘피해자 프레임’ 들고 나온 조선일보

“합리적 대화보다 투쟁과 폭력이 앞서는 한국적 노동 현실에서 만에 하나 삼성마저 노조로 인해 세계적 경쟁력을 잃게 되면 그 책임은 누가 지나” (☞ 반노동)

“한국의 그 어떤 기업인도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하면 그것으로 핍박을 받고 수용하면 또 그것으로 감옥에 간다” (☞ 피해자 프레임)

“삼성과 이 부회장이 할 일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해 삼성과 우리 경제를 더 키우는 것.” (☞ 세계 경쟁력과 경제활성화 강조)


▲ <이미지 출처=조선일보 홈페이지 캡처>

이재용이 사과를 하면서 ‘무노조 경영은 없다’고 했는데 조선일보는 여전히 사설에서 “노조로 인해 세계적 경쟁력을 잃게 되면 그 책임은 누가 지나”라며 반노동을 주장합니다. 조선일보가 경쟁력을 잃으면 조선일보 노조 때문인가요? 저는 삼성보다 더 ‘반노동적인 언론’이 있는 한 ‘노조에 대한 불신과 편견’은 앞으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거라고 봅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이번 사과문에서 삼성 지배구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재용과 기성 언론 상당수는 ‘경영권 승계는 없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세금 낼 거 제대로 다 내고 경영권 승계하면 문제 될 게 전혀 없습니다. ‘경영권 승계’ 하지 말라가 아니라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불법·위법·탈법 의혹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건데 왜 많은 언론이 이런 점에 대해선 외면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재용의 결단이라구요? 대체 뭘 결단했다는 걸까요. 사과문을 읽어봐도 잘 모르겠고 기사를 읽어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삼성과 언론 사이에 작동하는 ‘교감’일까요? 알맹이 없는 사과 ‘알맹이 있게 포장하느라’ 참 바쁜 언론들입니다.


출처  삼성의 ‘반쪽짜리’ 사과·언론의 ‘반쪽짜리’ 보도